2회차 · 나비
등짝 스매싱과 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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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쪽 눈을 슬그머니 떴다.
담임선생님이 사색이 되어 달려오고 있었지만, 민재의 초점은 오직 백설에게만 맞춰져 있었다. 민재는 가슴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아…… 동화책에서 봤어…… 독사과를 먹고 잠든 공주님은…… 왕자님의 뽀뽀를 받아야만…… 깨어날 수 있대……"
주변에 둘러선 햇살반 아이들이 숨을 훅 들이켰다.
선생님은 “민재야, 장난치지 말고 얼른 일어나!” 하며 다가왔지만, 민재는 꿋꿋하게 턱을 치켜들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달싹이는 꼴이 영락없이 마중 나온 참새 주둥이였다.
“설아…… 어서…… 나를 살려 줘…… 켁!”
감동적인 동화의 한 장면을 기대했던 민재의 등짝으로 매서운 손바닥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짝!
교실 전체를 쨍하게 울리는 묵직한 타격음이었다.
“으어억!”
민재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백설이 사정없이 등판을 후려친 것이었다.
백설은 민재의 멱살을 잡고 상체를 번쩍 일으켜 세우더니, 다시 한번 인정사정없이 등을 팡팡 내리쳤다.
“야! 헛소리하지 말고 뱉어! 사과 덩어리 목에 걸려서 진짜 숨 넘어갈 뻔한 주제에 어디서 뽀뽀 타령이야!”
“켁! 쿨럭! 커헉!”
등짝을 세 번째 얻어맞았을 때, 민재의 목구멍 속에 걸려 있던 커다란 사과 덩어리가 마침내 퉤 하고 튀어나왔다.
바닥으로 나뒹구는 침 묻은 사과 조각을 보며 담임선생님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 세상에! 진짜로 목에 걸렸던 거니? 민재야, 괜찮아?”
민재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멍하니 백설을 올려다보았다. 등짝이 얼얼하게 타들어 가는 통증 속에서 민재는 훌쩍거리며 물었다.
“설아…… 나 살아난 거야……?”
“그래, 살았다. 내 등짝 스매싱 덕분에.”
백설은 팔짱을 끼고 도끼눈을 떴다.
“그리고 너, 내 간식 뺏어 먹었으니까 내일 네 간식 나한테 바쳐. 알겠어?”
민재는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더니, 서러움 대신 헤벌쭉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왕자님의 로맨틱한 입맞춤 대신 가차 없는 등짝 강타를 당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백설이 제 손으로 자신을 ‘구해 줬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가득 찬 모양이었다.
“응! 내 초코파이 다 줄게! 내일도 내가 독사과 다 먹어 줄게!”
“또 먹기만 해 봐. 그때는 등짝이 아니라 명치를 칠 테니까.”
백설이 혀를 차며 자리로 돌아가자, 아이들은 흩어져 웅성거렸다.
동화 속 백설공주는 독사과를 먹고 쓰러졌지만, 샛별유치원의 백설은 독사과를 먹은 녀석의 등짝을 후려쳐 살려내는 대장부였다.
* * *
그날 이후 김민재의 백설바라기 행보는 더욱 극성스러워졌다.
은하빌라 201호와 202호의 철문을 사이에 두고, 민재는 아침마다 백설의 집 벨을 눌렀다.
“설아! 유치원 같이 가자!”
등원길에는 백설의 노란색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낑낑거렸고, 하원길에는 놀이터 모래사장에서 주운 반짝이는 유리구슬을 ‘보석’이라며 바쳤다. 백설이 귀찮아서 “저리 가, 찐빵아!” 하고 밀어내도 민재는 그저 헤헤거리며 뒤를 졸졸 따랐다.
민재에게 백설은 손댈 수 없이 눈부신 공주님이었고, 자신이 반드시 지켜야 할 평생의 짝이었다.
하지만 그 지독했던 첫 번째 구애는 생각보다 허무하고 갑작스럽게 마침표를 찍었다.
일곱 살 겨울, 유치원 졸업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은하빌라 앞 골목에 커다란 이삿짐 트럭이 들어섰다. 202호 민재네 아버지가 지방 지사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온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었다.
이삿짐이 하나둘 트럭에 실리는 동안, 민재는 201호 백설의 집 현관문 앞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으아앙! 나 이사 안 갈래! 설이랑 여기서 살 거야! 나 설이랑 결혼해야 한단 말이야!”
민재 어머니가 민재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질질 끌어당겼지만, 민재는 문고리를 양손으로 꽉 쥔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참다못한 백설이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야, 김민재. 시끄러워 죽겠네. 온 동네 떠나가겠다.”
백설의 얼굴을 보자마자 민재는 콧물을 주르륵 흘리며 매달렸다.
“설아…… 나 가기 싫어…… 부산 너무 멀단 말이야…….”
“멀긴 뭐가 멀어. 기차 타면 금방이지. 가서 밥이나 잘 챙겨 먹고, 딴 데 가서 사과 통째로 삼키지 마라.”
백설이 덤덤하게 말하자, 민재는 주머니에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무언가를 꺼내 백설의 손바닥 위에 쥐여주었다.
문방구 뽑기 기계에서 백 원을 넣고 뽑았을 법한, 조잡한 플라스틱 보석이 박힌 은색 반지였다.
“이거…… 내가 제일 아끼는 거야. 너 가져.”
“이걸 왜 나한테 줘?”
“내가 꼭…… 어른 되면 엄청 멋있어져서 돌아올게. 돈도 엄청 많이 벌고, 벤츠 타고 와서 설이 너 데리러 올 거야. 그때까지 딴 남자랑 결혼하면 안 돼! 알겠지?”
민재의 눈에는 세상 그 어떤 영웅보다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백설은 손바닥 위의 장난감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벤츠는 무슨. 자전거나 똑바로 타고 다녀라. 잘 가라, 찐빵.”
“나 찐빵 아니야…… 김민재야…… 설아아아!”
결국 민재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트럭 조수석에 실려 갔다. 트럭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백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흩뿌리던 민재의 모습은 그렇게 백설의 유년기 한 페이지로 남았다.
첫 번째 녀석은 그렇게 시끄럽고 요란하게 퇴장했다.
* * *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백설은 해가 갈수록 더욱 눈부시게 자라났다.
유치원 시절의 젖살이 빠지자 새하얀 피부와 짙은 눈썹, 밤하늘을 담은 듯 맑고 커다란 눈망울이 한층 더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다른 반 아이들이 창문에 달라붙어 백설을 구경했고,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선생님들은 출석부를 넘기다 백설의 얼굴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름도 백설인데, 얼굴도 정말 백설공주 같네.”
지긋지긋한 꼬리표는 초등학교에 와서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남자아이들은 짓궂게 사과를 던지며 놀리거나, 반대로 얼굴이 빨개져서 말도 못 붙이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여자아이들 중 일부는 백설이 예쁜 척을 한다며 은근한 시기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백설은 결코 고분고분한 공주 인형으로 머물지 않았다.
고무줄놀이를 방해하는 남자애의 정강이를 걷어차 울려 버렸고, 체육 시간 피구 경기에서는 불꽃 슛을 날려 상대 팀을 전멸시켰다. 미술 시간에는 공주나 성 대신 크레파스로 우주선과 로봇을 그렸고, 방과 후에는 동네 골목을 씩씩하게 뛰어다니며 자전거를 탔다.
‘나는 백설공주가 아니라 그냥 백설이야.’
백설은 세상이 자신에게 씌우려는 동화의 틀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자랐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사람들은 여전히 백설의 ‘껍데기’만을 보았다. 백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꿈을 품고 있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예쁜 아이, 언젠가 왕자님을 만나야 할 공주님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백설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여름, 백설의 어머니는 백설의 떨어지는 수학 성적을 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아, 너 다른 건 다 잘하는데 왜 수학만 보면 점수가 이 모양이니? 이래 가지고 중학교 가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엄마, 수학은 나랑 안 맞아. 숫자가 너무 빽빽해서 숨이 막힌단 말이야. 난 그림 그리는 게 훨씬 좋단 말이야.”
스케치북에 만화 캐릭터를 그리던 백설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림을 그리든 뭘 하든 기본은 해야지. 안 되겠다. 엄마가 옆 동네에 사는 아주 똑똑한 대학생 선생님 한 분 모셨으니까, 오늘부터 군말 말고 과외 받아.”
“과외? 나 과외 싫은데! 잔소리 듣기 딱 질색이야.”
백설이 스케치북을 덮으며 툴툴거렸다. 백설에게 ‘선생님’이란 그저 칠판에 공식을 적어대며 “설이는 얼굴도 예쁜데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같은 뻔한 소리나 늘어놓는 지루한 어른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네 시.
은하빌라 201호의 초인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딩동.
“설아, 선생님 오셨다! 문 열어 드려!”
주방에서 과일을 깎던 어머니의 목소리에 백설은 터덜터덜 현관으로 걸어갔다. 백설은 문을 열기 전부터 팔짱을 딱 끼고 한껏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기선 제압을 해 두어야 얕보이지 않는다는,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철컥.
현관문이 열리고, 백설은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백설의 눈이 저도 모르게 조금 커졌다.
문 앞에는 헐렁한 체크무늬 셔츠에 단정한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은테 안경 너머로 드러난 눈매는 유난히 깊고 맑았으며, 콧날은 반듯하고 깔끔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골목길을 걸어왔을 텐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처럼 청량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깨에 둘러멘 낡은 가죽 가방과 손에 든 두꺼운 노트가 지적인 인상을 더했다.
청년은 문을 열고 뾰로통하게 서 있는 백설을 내려다보더니,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 여기가 백설이 집 맞니?”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한여름의 바람처럼 시원하면서도, 갓 구운 빵처럼 따뜻하고 차분한 저음이었다.
백설은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서 있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헛기침을 했다.
“맞는데요. 누구세요?”
“오늘부터 설이 수학 가르쳐 주기로 한 한도윤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도윤은 허리를 숙여 백설과 눈높이를 맞추더니, 손을 내밀었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어설픈 어른의 태도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를 마주하는 정중한 인사였다.
백설은 도윤의 길쭉하고 깨끗한 손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제 작은 손을 얹었다. 도윤의 손바닥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들어오세요.”
백설이 한 발짝 물러서자, 어머니가 주방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어머, 도윤 학생! 어서 와요. 날씨가 많이 덥죠? 설아, 인사 제대로 드렸어? S대 수학교육과 다니는 아주 똑똑한 선생님이셔.”
어머니의 호들갑에 도윤은 쑥스러운 듯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머니. 설이가 문도 잘 열어 주고 씩씩하게 맞아 주던데요.”
“아휴, 씩씩하기만 하면 뭐해요. 고집이 황소고집이라 걱정이에요. 낯가림도 심하고…….”
“괜찮습니다. 천천히 친해지면 되죠.”
도윤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거실로 들어섰다.
백설은 자신의 방으로 도윤을 안내하면서 힐끗힐끗 그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S대……? 진짜 공부 잘하는 사람인가 보네.’
백설은 도윤이 다른 어른들처럼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와, 진짜 공주님처럼 생겼네!” 하고 호들갑을 떨 줄 알았다. 백설을 처음 본 사람들은 열에 아홉이 다 그랬으니까.
하지만 도윤은 백설의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을 때까지도 백설의 외모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얹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