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차 · 드림캐처
멈춰버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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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사람을 그렇게 빤히 보니?"
열 살의 한승아가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익숙한 문장이었다.
"아줌마, 다리 조심해요." "뭐?" "단풍 다 떨어지고 첫눈 올 때쯤에요. 계단에서 굴러떨어져요. 뼈가 부러져서 병원에 오래 누워 있어야 해요."
그 말을 들은 앞집 여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여자는 승아의 어머니를 찾아가 악을 썼다.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예요? 멀쩡한 사람한테 다리가 부러지니 어쩌니 악담을 퍼붓고!"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애가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니에요! 쟤 눈 좀 봐! 눈에 귀신이 들어찼어. 소름 끼쳐서 원."
동네 사람들은 승아를 슬금슬금 피했다. 승아의 눈에는 보였다. 정확히 석 달 뒤, 계절 하나가 지나갈 무렵에 그 사람이 겪게 될 가장 끔찍한 순간들이. 타는 냄새, 피비린내, 찢어지는 비명, 법원에서 날아온 파산 통지서. 승아는 불행을 막아주고 싶어서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굵은 소금과 차가운 손가락질뿐이었다. 사람들은 불행을 예고하는 아이를 불행 그 자체로 여겼다.
어린 승아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눈에 비치는 백 일 남짓의 미래, 그 기이한 감각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채 숨을 죽였다.
그리고 스물아홉이 된 지금.
"선생님, 제발 이번 한 번만 더 봐주세요." "예약 손님 외에는 상담하지 않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더블, 아니 세 배로 드릴게요. 네?"
승아는 차분한 눈으로 문가에 매달려 있는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다. 재개발이 멈춰 선 서울 구도심의 외진 골목, 낡은 상가 1층에 자리한 타로 상담소 ‘여백’의 풍경이었다.
"순서를 어기면 상담의 흐름이 깨집니다. 돌아가세요." "아, 제발요! 이번 투자 건에 제 전 재산이 걸려 있단 말입니다! 석 달 뒤에 이게 터지는지 안 터지는지만 딱 한마디만 해주시면 되잖아요!"
승아는 대답 대신 문패의 손잡이를 가리켰다. 남자는 이를 악물며 물러섰지만, 눈빛에는 원망과 함께 지독한 맹신이 서려 있었다.
어릴 때 귀신 들렸다고 돌팔매질을 하던 사람들은, 어른이 된 승아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타로 카드라는 그럴듯한 도구를 쥐여주자, 불길한 저주는 신비로운 예언으로 둔갑했다. 입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고, 상담소 여백의 예약 장부는 늘 석 달 치가 빽빽하게 차 있었다.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정규 예약 손님이 들어왔다.
"저…… 한승아 선생님이시죠? 두 시 예약한 김은영인데요."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승아는 자리에 앉아 찻잔에 따뜻한 둥굴레차를 따랐다. 손님은 잔을 쥐고도 덜덜 떨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은 자국이 역력했다.
"어떤 고민으로 오셨습니까?" "이직 문제예요. 지금 다니는 대기업을 계속 다녀야 할지, 아니면 이번에 제안받은 벤처기업 이사 자리로 옮겨야 할지……." "둘 중 어느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우셨나요?" "솔직히 연봉을 두 배나 준다고 해서 벤처 쪽으로 가고 싶어요. 지분도 준다고 하고요. 그런데 남편은 자꾸 불안하다고 말려서요. 선생님이 족집게처럼 미래를 맞히신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승아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천을 매만졌다. 그녀의 손길 아래에는 아무런 그림도, 숫자도 새겨지지 않은 새까만 카드 덱이 놓여 있었다.
"손을 얹으세요." "이 카드에 아무것도 안 그려져 있는데요?" "손님의 기운을 정돈하는 카드입니다. 왼손을 얹고, 옮겨가려는 회사의 사무실 풍경을 떠올려 보세요. 석 달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김은영이 조심스럽게 블랭크 카드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 순간, 승아의 손가락 끝으로 서늘한 파동이 흘러들었다. 백일시. 정확히 90여 일 뒤의 시공간이 승아의 감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탁한 공기. 먼지가 자욱한 텅 빈 사무실 바닥에 나뒹구는 서류들. 붉은 압류 딱지가 붙은 모니터. 그리고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김은영의 모습.
'사기였어…… 전부 거짓말이었어…… 내 퇴직금까지 다 넣었는데!'
승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미래의 환영은 순식간에 흩어졌고, 눈앞에는 초조하게 입술을 달싹이는 손님이 앉아 있었다.
"카드를 세 장 뽑아보시겠어요?"
김은영이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세 장 골라 뒤집었다. 탑 카드, 거꾸로 매달린 남자, 칼 10번. 비명처럼 처참한 배열이었다.
"어머…… 그림이 왜 이래요? 다 안 좋은 것만 나왔는데……." "이직 제안을 한 사람이 이전 직장 동료입니까?"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예전에 같은 부서 팀장이었던 선배예요!" "그 자리는 덫입니다."
승아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덫이라니요?" "석 달 뒤, 그 회사는 공중분해 됩니다. 대표는 야반도주하고 남은 법적 책임과 빚은 새로 영입된 이사진에게 넘어갈 겁니다. 김은영 씨의 이름으로요." "말도 안 돼요! 그 선배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요!" "투자금을 요구받지 않으셨습니까? 이사 등기를 치려면 일정 지분을 매입해야 한다는 명목으로요."
김은영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 그냥 보증금조로 5천만 원만 넣으라고……." "넣지 마세요. 그 제안을 거절하면 그 선배라는 사람은 온갖 감정에 호소하다가 결국 본색을 드러내며 등을 돌릴 겁니다. 지금 계신 직장에 그대로 남으세요. 거기가 안전합니다." "정말…… 정말 안 가는 게 맞을까요?" "선택은 손님의 몫입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벼랑이 있습니다."
김은영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도망치듯 상담소를 빠져나갔다. 복채 봉투가 테이블 위에 묵직하게 놓였다.
승아는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또 한 사람을 구했다. 적어도 석 달 뒤, 저 여자가 차가운 바닥에서 울부짖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묵직한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미래를 피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 그 사람을 구한 걸까."
승아는 블랭크 카드를 천천히 정리했다. 카드를 섞을 때마다 귓가에 모래시계가 뒤집히는 듯한 스스륵 소리가 들려왔다.
상담이 비는 늦은 오후, 승아는 겉옷을 걸치고 상담소 밖으로 나왔다. 골목 맞은편, 낡은 유리문 너머로 돋보기를 눈에 낀 노인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태엽당’. 반세기 동안 자리를 지켜온 시계 수리점이었다.
딸랑.
"어르신, 계세요?" "오냐, 여백 선생 왔는가."
백발이 성성한 오도경이 핀셋으로 작은 톱니바퀴를 집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작업대 위에는 수백 개의 태엽과 톱니, 시계 침들이 흩어져 있었다. 가게 안은 괘종시계와 손목시계들이 내는 규칙적인 째깍거림으로 가득했다.
"오늘도 손님이 많더구나.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만 족히 대여섯은 봤어." "다들 불안해서 오는 거죠." "불안하니까 길을 묻는 법이지. 차 한잔할 텐가?" "네, 어르신."
오도경은 손을 대충 털고 낡은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승아는 수리대 위에 놓인 커다란 회중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엽이 다 풀렸네요." "어제 들어온 물건인데, 주인이 시계가 자꾸 멈춘다고 억지로 용두를 감아 돌렸더군. 덕분에 안쪽 스프링이 엉망으로 꼬였어." "고칠 수 있나요?" "꼬인 걸 억지로 풀려고 하면 끊어져. 천천히 달래가면서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돌려줘야지."
오도경이 건넨 투박한 머그잔에서 구수한 메밀차 냄새가 올라왔다.
"선생은 요즘도 그…… 백 일 뒤를 보고 있는가?" "네." "보이는 대로 다 말해주고?" "피할 수 있는 구덩이는 피하라고 일러줍니다. 다들 그걸 바라고 저를 찾아오니까요."
오도경이 돋보기를 벗어 목에 걸었다. 노인의 주름진 눈이 승아를 깊숙이 응시했다.
"사람들이 왜 넘어지는 줄 아나?" "앞을 보지 못해서 아닌가요?" "아니지. 돌부리가 거기 있는 줄 알면서도, 딴생각을 하느라 제 발을 안 봐서 넘어지는 거라네." "……." "돌부리를 치워주면 그 사람은 당장은 안 넘어지겠지. 하지만 다음에 더 큰 바위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나?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국 더 깊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법이야."
승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노인의 말은 지난 몇 달간 승아의 가슴을 짓누르던 불길한 예감의 정곡을 찔렀다.
"제가 하는 일이…… 잘못된 걸까요?" "잘못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지 않다는 거지. 시간이라는 놈은 억지로 댐을 쌓아 막으면, 언젠가 그 둑을 터뜨리고 더 사납게 덮쳐오는 법이거든." "반동……." "그래. 시간의 무게를 거저 넘기려는 자에게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가게 안을 채우는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째깍, 째깍, 째깍.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카운트다운처럼.
"선생, 자네 얼굴에 그늘이 깊어. 복채를 받아서 부자가 되는 건 좋은데, 남의 짐을 너무 가볍게 덜어주려 하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승아는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담소로 돌아오는 짧은 골목길,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와 옷깃을 파고들었다.
골목 끝, 상담소 여백의 문 앞에 누군가 서성이고 있었다. 헐렁한 카디건을 걸치고 고개를 푹 숙인 체구 작은 여자. 승아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연주 씨?"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배연주. 1년 전, 승아를 찾아와 인생의 가장 큰 갈림길에서 조언을 구했던 손님이었다. 당시 연주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승아는 그녀가 뽑은 카드와 백일시를 통해 남자의 심각한 도박 중독과 빚더미를 감지했다. 승아는 단호하게 파혼을 권유했고, 연주는 그 조언을 따라 파멸 직전의 결혼을 가까스로 피했다.
그랬던 연주가, 1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승아를 올려다보는 연주의 얼굴은 안도나 감사가 아닌, 짙은 절망과 원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뺨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선생님……." "연주 씨, 안으로 들어와요. 날이 추워요."
승아는 서둘러 문을 열고 연주를 안으로 이끌었다.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상담실 안에서도 연주는 코트를 벗지 못한 채 온몸을 잘게 떨었다.
"따뜻한 차 좀 드릴게요." "차는 됐어요, 선생님."
연주의 목소리는 메말라 바스러질 것 같았다.
"저 좀…… 살려주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1년 전에 분명 파혼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새 출발 하신다고……." "새 출발이요? 하, 새 출발……."
연주가 자조적인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선생님 말씀대로 그 사람이랑 끝냈어요. 그 사람, 석 달 뒤에 사채업자들한테 쫓겨서 야반도주했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선생님이 제 은인인 줄 알았어요. 내 인생을 구해주신 신인 줄 알았다고요." "그런데요?" "그다음부터 제 인생이 완전히 멈춰버렸어요."
연주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떤 선택도 못 하겠어요. 회사를 옮기려고 해도 '이러다 또 망하는 거 아닐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이 사람도 뒤에선 사기꾼 아닐까?'…… 아무것도 결정을 못 하겠어요. 숨이 막혀요." "연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