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 샤인
채권자들을 쪼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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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었다.
호화로운 담비 가죽 코트 자락이 먼지 낀 마루를 쓸었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던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테오가 책상 위에 던져놓은 서류 한 장이 그의 목줄을 죄는 밧줄이나 다름없었다.
“도, 도련님…… 이건 음해입니다. 처남 녀석이 중간에서 장난을 친 것이지,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가문을 위해 밤낮으로 헌신한 저를 이렇게 몰아붙이시면……”
“변명은 재판소에서 하십시오.”
테오의 목소리에는 티끌만 한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당신이 횡령한 자금의 흐름, 처남 명의의 유령 회사 ‘베른 무역’으로 흘러간 송금 전표, 남부 제3창고 관리인의 허위 입고 진술서까지. 이미 모든 물증의 사본을 제국 감사원과 황실 재정총국에 보낼 수 있도록 봉인해 두었습니다.”
테오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탁, 소리와 함께 낡은 탁자 위에 묵직한 서류철 하나가 더 얹혔다.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에른스트 부장.”
테오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차가운 흑안이 에른스트의 동공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첫째, 이 자리에서 순순히 횡령금을 전액 토해내고 상회의 모든 직책과 권한을 내려놓는 것. 둘째, 내일 아침 제국 경비대와 상업재판소 집행관의 손에 이끌려 광산 종신 노역형으로 끌려가는 것.”
“그, 그것은……!”
“아, 한 가지를 빠뜨렸군요. 전시 비축 물자인 마나석 유용죄가 적용되면, 당신의 처가 일족 전원의 재산 몰수와 시민권 박탈도 함께 집행됩니다. 처남 혼자 짊어지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에른스트의 숨이 턱 막혔다.
그는 테오의 눈을 보았다. 사생아라며 뒷방에 처박혀 숨죽이고 살던 나약한 소년의 눈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기업을 해체하고 삼켜본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한 치의 자비도, 타협의 여지도 없었다.
“……도련님, 제가……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에른스트의 입술 사이로 패배를 인정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간단합니다. 자산 양도 및 손해배상 합의서에 서명하십시오.”
테오는 미리 준비해 둔 양피지를 밀어냈다.
양피지 상단에는 마탑의 붉은 밀랍 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에른스트 폰 테란이 사적으로 편취한 540만 제국 금화 전액의 즉각적인 현금 반환. 더불어 상회에 끼친 신용 훼손 및 기회비용 손실에 대한 위약벌로, 당신이 보유한 테란 상회 지분 4.5%와 수도 인근의 개인 부동산 일체를 상회에 무상 증여한다.”
“지, 지분과 부동산까지 말입니까? 그건 제 전 재산입니다! 그걸 다 내놓으면 저는 알거지가 됩니다!”
“알거지로 살아남는 편이, 광산 밑바닥에서 마나 분진을 마시며 서서히 폐가 굳어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테오가 건조하게 받아쳤다.
“게다가 이건 협상이 아닙니다. 감사 결과에 따른 당연한 징구 절차일 뿐이죠. 횡령범에게 퇴직금을 챙겨줄 사모펀드는 대륙 어디에도 없습니다.”
에른스트는 이를 악물었다. 피 맛이 입안에 번졌다. 그러나 눈앞의 사생아는 빈틈을 주지 않았다. 서명을 거부하는 순간,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가문 내 자신의 방계 혈통 전체가 파멸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었다.
“피핀.”
“예, 예! 도련님!”
문가에서 눈을 껌뻑이며 상황을 지켜보던 피핀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마나 잉크와 인장용 인주를 가져와라.”
“넷! 즉각 대령하겠습니다요!”
피핀이 잽싸게 책상 위에 깃펜과 보랏빛 마나 잉크병을 올려놓았다.
에른스트는 떨리는 손으로 깃펜을 쥐었다. 깃펜 끝이 마나 잉크에 닿자, 미약한 마력이 파동 치며 양피지 위로 스며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마탑의 공증 마법이 걸린 구속력 있는 계약서였다. 서명하는 순간, 기재된 모든 자산의 법적 소유권이 즉시 테오 폰 테란에게 귀속된다.
사각, 사각.
에른스트의 서명이 끝나자 양피지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며 문장이 각인되었다.
“……다, 됐습니다. 비밀 금고의 마나 열쇠와 권리증은 제 저택 서재의 세 번째 서랍 밑바닥에 숨겨두었습니다. 금고 안에는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금화와 볼코프 금융상단의 무기명 상업어음이 들어 있습니다.”
에른스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푸른빛을 띠는 마나 열쇠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에른스트 전(前) 조달부장.”
테오는 마나 열쇠를 집어 들며 담담하게 선언했다.
“당신은 이 시각부로 테란 상회의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개인 소지품만 챙겨서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상회 본관에서 퇴거하십시오. 가문의 명예를 고려해 형사 고발은 유예하겠으나, 상회의 영역에 한 발짝이라도 다시 발을 들이는 순간 이 서류철은 즉시 황실 재정총국으로 넘어갈 겁니다.”
“……명심, 하겠습니다.”
에른스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굽어버린 허리로 문을 열고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상회를 집어삼킬 듯 기세를 올리던 조달부장의 초라한 퇴장이었다.
집무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총지배인 클로드 바우어는 안경을 벗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손끝이 경악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 아니, 상회주님.”
클로드의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선대 가주가 급서한 이후 누구도 인정하지 않던 사생아를 향해, 상회의 늙은 총지배인이 마침내 머리를 숙였다.
“수십 년간 상회를 갉아먹던 고름을 단 반나절 만에 도려내셨습니다. 선대 가주님께서도 해내지 못하셨던 일입니다.”
“칭찬은 이르군요, 클로드 지배인님.”
테오는 차갑게 식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책상 위의 장부를 가리켰다.
“이제 겨우 내부 청소의 첫 단계를 끝냈을 뿐입니다. 진짜 문제는 방 밖에 있으니까요.”
클로드의 표정이 다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부채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테오는 숫자를 명확하게 정리한 양피지를 펼쳤다.
“에른스트에게서 회수한 자금은 금화 현물 380만, 즉시 현금화 가능한 볼코프 무기명 어음 160만. 총 540만 금화입니다. 여기에 상회가 현재 보유한 유동 현금 80만을 더하면 당장 가용한 자금은 총 620만 금화.”
테오의 건조한 목소리가 집무실의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우리가 엿새 안에 갚아야 할 총 부채는 3,700만 제국 금화입니다. 620만을 전부 털어 넣어도 여전히 3,080만 금화가 부족합니다.”
“도련님, 엿새는 너무나 짧습니다.”
클로드가 비통한 목소리로 탄식했다.
“대륙의 어떤 대형 상단도 엿새 만에 3,000만 금화가 넘는 유동성을 마련할 수는 없습니다. 볼코프 금융상단과 백색 마탑이 걸어둔 ‘영혼각인 공증서’는 기한이 단 하루만 지나도 즉각 집행됩니다. 상회의 모든 물류 거점과 창고는 압류되고, 도련님의 마력 회로는 파괴되어 폐인이 될 것입니다.”
영혼각인 공증서.
그것은 단순한 법적 강제 집행을 넘어선 마법적 구속이었다. 채무 불이행이 확정되는 순간, 계약서에 깃든 마탑의 고위 저주 마법이 채무자의 영혼과 마력 회로를 직접 타격한다. 자산의 파산이 곧 육체와 정신의 영구적 파멸로 이어지는 잔혹한 제도였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테오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볼코프 금융상단과 그 뒤에 도사린 칠두 카르텔은 애초에 돈을 돌려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원금 회수가 아니라, 테란 상회가 대륙 요충지에 보유한 12개 복합 물류 기지와 항만 독점 사용권을 헐값에 강탈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미 덫에 걸린 것 아닙니까?”
“덫에 걸린 짐승은 다리를 물어뜯기 마련이지만, 사냥꾼을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법도 있는 법입니다.”
테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걸린 거대한 대륙 지도로 걸어갔다.
지도 위에는 제국 전역을 거미줄처럼 잇는 테란 상회의 물류망이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비록 방만한 경영으로 적자가 누적되었으나, 수백 년간 축적된 인프라의 가치는 여전히 대륙 최고 수준이었다.
“클로드 지배인님, 금융의 본질은 숫자가 아니라 ‘시간’과 ‘레버리지’입니다.”
테오가 지도의 중심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3,700만 금화를 한 번에 갚으려 하니 답이 안 나오는 겁니다. 채권자들을 한 덩어리로 보지 말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쪼개서 각개격파해야 합니다.”
“각개격파…… 말씀이십니까?”
클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오는 분필을 들어 칠판에 세 개의 단어를 적어 내렸다.
1. 황실 재정총국 (체납 세금 700만 금화) 2. 백색 마탑 (촉매 대금 800만 금화) 3. 볼코프 금융상단 (원리금 2,200만 금화)
“채권자 삼자의 구조를 분석해 보죠.”
테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첫째, 황실의 체납 세금 700만 금화. 황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수 부족과 귀족 카르텔의 권력 비대화입니다. 칠두 카르텔이 상권을 독점하면서 황실의 재정 주권은 날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현재 황실 재정총국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제2황녀, 베아트리체 엘 드 발렌 전하십니다.”
클로드가 즉각 대답했다.
“소문에 따르면 황녀 전하는 황실의 금고를 채우기 위해 귀족원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계시며, 매우 실리적이고 냉혹한 분이라 들었습니다.”
“완벽한 협상 파트너로군요.”
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에게 제안할 카드는 단순한 세금 납부가 아닙니다. 테란 상회의 물류망을 황실 직속 조달망으로 재편해 황실의 유통 마진을 30% 절감시키고, 장기적으로 황실 세수를 두 배로 늘려줄 구조조정 계획서를 제시할 겁니다. 대신 체납 세금 700만 금화의 납기를 1년간 유예받고, 황실 보증 채권 형태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클로드의 입이 떡 벌어졌다.
“황실의 세금을…… 유예를 넘어 보증 채권으로 전환한다고요? 황실이 일개 상회의 빚을 보증해 준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전례가 없다면 만들면 됩니다. 명분과 확실한 숫자의 이익을 보여준다면, 자금이 궁한 황녀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황실 세금 700만이 유예되면 당장 급한 불 하나가 꺼집니다.”
테오는 두 번째 항목으로 분필을 옮겼다.
“둘째, 백색 마탑의 촉매 대금 800만 금화. 마탑 놈들이 가장 탐내는 것은 금화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금화로 사들여야 할 고순도 마나석과 혁신적인 마도 연구 결과물이죠.”
“하지만 상회에는 현재 마탑에 넘겨줄 고순도 마나석 재고가 없습니다. 칠두 카르텔이 원석 공급을 차단해 버렸으니까요.”
“원석이 없다면 가공 기술로 승부하면 됩니다.”
테오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상회 산하의 제4연구소에 방치되어 있던 자산이 하나 있더군요. 마탑 연합에서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했던 수석 연금술사, 루카스 펠.”
클로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루카스 펠…… 선대 가주님께서 그의 기괴한 연구를 딱하게 여겨 거두어 주셨던 자입니다만, 상회의 돈만 축내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던 자입니다. 고효율 마나 압축 기술을 연구한다며 실험실을 몇 번이나 폭파시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