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라, 내 제자들아1회차

1회차 · 샤인

괴물 제자의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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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성 형양현으로 내려가는 산길은 완만하고 따스했다.

머리 위로는 부드러운 봄바람이 스치고 발밑에는 부드러운 흙탕 대신 마른 흙길이 펼쳐져 있었다. 연우진은 삼베옷 소매를 펄럭이며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그의 나이 스물둘. 일곱 살에 만수노인의 손에 이끌려 심산유곡에 틀어박힌 지 무려 십오 년 만의 하산이었다.

우진의 맑고 커다란 눈망울에는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비쳤다.

“공기가 참 달구나. 피 냄새도 안 나고, 독충 썩는 냄새도 안 나고.”

그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 단전에서 무량생기공(無量生氣功)의 따스한 기운이 절로 웅크렸다 펴지며 온몸의 기경팔맥을 활보했다.

보통의 무인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였지만, 우진에게는 지난 십오 년간의 세월이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인내의 나날이었다. 사부 만수노인이 베푼 이른바 ‘극락훈육(極樂訓育)’은 이름만 극락일 뿐 실상은 지옥의 염라대왕도 혀를 내두를 생존 투쟁의 연속이었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서 백보신권만 한 바위가 쿵쿵 떨어져 내렸고, 밥을 먹으려 숟가락을 들면 반찬 속에 맹독을 품은 칠점사의 꼬리가 꿈틀거리기 일쑤였다. 아침 세수는 천 길 낭떠러지 폭포 밑에서 떨어지는 빙하수를 정수리로 받아내며 해야 했고, 달밤의 산책은 굶주린 흑웅 세 마리와 맨손으로 씨름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제자야, 살아남는 것이 곧 도(道)이며, 숨을 쉬는 것이 곧 무(武)니라.’

만수노인은 늘 흐릿한 눈을 껌벅이며 그렇게 읊조리곤 했다. 그리고 며칠 전, 우진이 마침내 무량생기공의 제구층을 완벽히 체화하여 천 길 절벽에서 떨어진 집채만 한 암석을 맨손으로 받아 가루로 부숴버렸을 때, 사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쥐여주었다.

‘우진아. 넌 이제 더 배울 것이 없다. 형양현으로 가거라. 그곳 번화가 한복판의 취선루(醉仙樓)에 가면 내가 네 앞날을 위해 십오 년간 차곡차곡 쌓아둔 막대한 유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도장을 열고 네 뜻을 펼쳐라.’

그 말을 끝으로 사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우진은 품 안의 두루마리를 소중하게 다독였다. 사부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 두신 밑천이라니. 거친 훈련 속에서도 언제나 제자의 앞길을 걱정해 주시던 스승의 애틋한 부정(父情)이 가슴을 뭉클하게 적셨다.

“사부님,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훌륭한 관주가 되어 만수도장(萬壽道場)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겠습니다.”

우진은 주먹을 꽉 쥐며 형양현의 웅장한 성문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형양현의 중심가는 활기가 넘쳐났다. 비단옷을 입은 거상들과 화려한 마차, 길가에 늘어선 온갖 먹거리 노점들이 우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는 삼 층짜리 누각이 바로 취선루였다.

붉은 칠을 한 기둥과 금박으로 장식된 간판, 문전성시를 이루는 손님들 사이로 풍기는 기름진 고기 냄새와 달콤한 국화주 향기가 진동했다.

우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취선루의 문턱을 넘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몇 분이십니까?”

점소이가 상냥하게 다가오다가, 우진의 허름하기 짝이 없는 삼베옷과 짚신을 보더니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우진의 낯빛은 워낙 맑고 눈망울이 티 없이 깨끗하여 함부로 내치지는 못했다.

“장 지배인 어르신을 뵈러 왔습니다. 만수노인 사부님의 제자 연우진이라고 합니다.”

그 순간, 분주하게 찻잔을 나르던 점소이의 손이 덜컥 멈췄다.

“……예? 마, 만수노인요?”

점소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더니, 귓가까지 붉으락푸락해졌다. 그는 마치 귀신을 본 사람처럼 쟁반을 내던지듯 카운터에 올려놓고는 안쪽 집무실을 향해 비명을 지르며 뛰어갔다.

“대방 어르신! 대방 어르신! 그, 그 늙은이…… 아니, 만수노인의 제자가 나타났습니다!”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 방문이 벌컥 열렸다.

풍채가 둥글넓적하고 배가 불룩 나온 중년 사내, 취선루의 실질적인 총책임자인 장 지배인이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묵직한 주판과 두꺼운 장부책 서너 권이 들려 있었다.

“어디냐! 그 파렴치하고 천인공노할 먹튀 노괴의 종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장 지배인은 홀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연우진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핏대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네놈이냐? 만수 그 미치광이의 제자라는 놈이?”

우진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포권을 취하며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예, 장 지배인 어르신. 사부님께서 이곳에 저를 위한 막대한 유산을 맡겨두셨다 하여 찾아뵈었습니다. 사부님의 오랜 벗이시라 들었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우진의 얼굴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순수한 존경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 천진난만한 표정을 본 장 지배인은 숨이 턱 막히는 듯 가슴을 쥐어뜯었다.

“유, 유산……? 십오 년 동안 떼먹은 술값이 유산이라고? 으하하, 유산이라니!”

장 지배인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장부를 우진의 코앞에 쾅 소리가 나도록 펼쳐 보였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빼곡한 먹글씨와 붉은 도장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잘 보아라, 이 철딱서니 없는 놈아! 십오 년 전부터 그 노괴가 마셔댄 천일취가 백이십 병, 뜯어먹은 통돼지 바비큐가 삼백 마리, 취선루 최고급 특실에서 자빠져 잔 날이 도합 육백 일이 넘는다! 원금과 이자를 합쳐서 총 삼천팔백 냥! 삼천팔백 냥이다!”

장 지배인의 입에서 침이 사방으로 튀었다.

주변에 앉아 있던 손님들도 ‘삼천팔백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에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웅성거렸다. 웬만한 번화가의 기와집 수십 채를 사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장 지배인은 우진이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거나 도망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우진은 장부에 적힌 숫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두 손을 모아 감격 어린 탄성을 내뱉었다.

“아아……! 과연 사부님이십니다.”

“……뭐?”

장 지배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우진의 맑은 눈동자에는 진심 어린 경외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늘 제게 말씀하셨지요. 무릇 진정한 무인은 편안한 온실 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거친 풍파와 세파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요. 삼천팔백 냥이라는 거대한 빚더미를 제게 남기심으로써, 자립심과 사회성을 기르고 강인한 생활력을 시험하시려는 깊은 뜻이었군요!”

“이, 이놈이 미쳤나?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걱정 마십시오, 장 지배인 어르신. 사부님의 은혜를 입은 제자로서, 이 삼천팔백 냥의 시련을 기쁘게 짊어지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한 푼도 빠짐없이 전부 갚아드리겠습니다!”

우진은 싱글벙글 웃으며 가슴을 탕탕 쳤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당당하고 해맑아서, 장 지배인은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사기꾼의 눈빛이 아니다. 진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기인이었는데, 그 밑에서 십오 년을 미친놈의 눈빛이다!’

장 지배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만수노인 그 영감탱이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기인이었는데, 그 밑에서 십오 년을 굴렀다는 제자는 한술 더 떠서 아예 뇌의 구조가 다른 것 같았다.

장 지배인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저 녀석을 관아에 넘겨봤자 삼천팔백 냥은커녕 동전 한 닢도 건질 수 없다. 뼈 빠지게 일을 시키든 도장을 차려 돈을 벌게 하든, 어떻게든 곁에 묶어두고 빨대를 꽂아야 했다.

“크흠! 좋다. 네놈이 도망치지 않고 갚겠다고 하니 내 기회를 주마. 하지만 당장 네놈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을 터. 형양현 북쪽 산자락에 내가 오래전에 사두었다가 방치해 둔 낡은 장원이 하나 있다. 거기서 도장을 열든 흙을 파먹든 마음대로 해라. 대신 매달 나오는 수익의 칠 할은 외상값으로 취선루에 상납해야 한다. 알겠느냐?”

장 지배인이 내민 것은 사실상 형양현 사람이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흉가였다. 비바람에 지붕이 뚫리고 온갖 잡초와 독사가 득실거려 귀신이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팔리지도 않던 폐가였다.

그러나 우진의 눈은 번쩍 뜨였다.

“장원을 공짜로 내어주신단 말씀입니까? 어르신, 사부님 말씀대로 세상 인심은 참으로 따뜻하군요!”

“……공짜가 아니라 채무 상환용 담보다, 이 멍청아! 당장 계약서에 지장이나 찍어라!”

장 지배인은 우진의 변심을 우려해 번개 같은 솜씨로 차용증과 토지 사용 계약서를 작성해 내밀었다. 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지손가락을 먹물에 푹 담가 꾹 찍었다.

“감사합니다, 지배인님! 만수도장의 번영과 취선루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진은 계약서 한 장과 허름한 열쇠 꾸러미를 품에 넣고는, 마치 천하제일의 보물을 얻은 사람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취선루를 나섰다.

장 지배인은 멀어져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사기를 친 건가, 당한 건가……? 왜 저놈이 더 신나 보이는 거지?”

형양현 북쪽 외곽, 인적이 드문 산자락 중턱.

우진이 도착한 ‘장원’의 몰골은 참으로 처참했다.

돌담은 절반 이상 무너져 내려 돌무더기가 나뒹굴고 있었고, 솟을대문은 경첩이 삭아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마당에는 사람 허리 높이까지 자란 억센 잡초와 가시덤불이 빽빽했고, 본채의 기와지붕은 군데군데 뻥 뚫려 하늘이 훤히 보였다.

썩어가는 나무 냄새와 눅눅한 곰팡내, 그리고 수풀 사이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바람 소리까지. 영락없이 십 년은 버려진 귀신 들린 폐가였다.

하지만 우진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와아……! 지붕에 구멍이 겨우 저것밖에 안 뚫렸네?”

우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부님과 살던 초옥은 비가 오면 방바닥이 무릎까지 물에 잠겨서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잤는데, 여긴 방바닥이 마른 흙이잖아! 게다가 벽체도 돌과 흙으로 단단하게 서 있고…… 이런 호사스러운 곳이 내 도장이 되다니!”

우진에게 이 폐가는 궁궐이나 다름없었다.

독충이 우글거리는 늪지대도 아니고, 자고 일어나면 눈보라에 파묻히는 설산도 아니었다. 발을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험도 없는, 지극히 평화롭고 안전한 지상낙원이었다.

“좋아! 몸 좀 가볍게 풀어볼까.”

우진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삼베옷 윗도리를 시원하게 벗어 던졌다.

햇빛 아래 드러난 그의 상체는 군살 하나 없이 매끄러우면서도,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들이 섬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피부 곳곳에는 십오 년간의 맹훈련이 남긴 수많은 상흔이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우진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영차!”

그는 잡초를 베기 위해 낫을 찾는 대신, 맨손으로 가시덤불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무량생기공의 맑은 기운을 두르자, 살을 찢을 듯 날카로운 가시들이 부드러운 풀잎처럼 바스러졌다.

우진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잡초를 뿌리째 뽑아냈다.

“사부님은 술을 마시고~ 제자는 빚을 갚네~ 봄바람 솔솔 부니~ 이 얼마나 신바람 나는가~ 룰루랄라~”

보통 사람 장정 스무 명이 사흘 밤낮을 매달려도 끝내지 못할 잡초 뽑기였다. 하지만 우진에게 이것은 훈련도 뭣도 아닌, 그저 가벼운 몸풀기이자 유희에 불과했다.

날마다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며 맨손으로 바위를 깎아내던 훈련에 비하면, 땅바닥의 풀을 뽑는 것은 솜사탕을 뜯어 먹는 것만큼이나 나른하고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순식간에 마당의 잡초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커다란 언덕을 이루었다.

우진은 이번엔 마당 한구석에 무너져 내린 담벼락으로 다가갔다. 사람 서너 명이 달라붙어도 꿈쩍하지 않을 집채만 한 화강암 덩어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이쿠, 마침 좋은 운동기구가 있네.”

우진은 맑은 눈을 빛내며 바위 밑으로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기합도 넣지 않고 가볍게 힘을 주었다.

번쩍!

수백 근에 달하는 거대한 바윗덩이가 허공으로 번쩍 들려 올려졌다. 우진은 바위를 머리 위로 받쳐 들고는 마치 장난감을 다루듯 가볍게 저글링을 하듯 허공에 띄웠다가 받기를 세 번 반복했다.

“오, 묵직하니 손맛이 좋네. 담벼락을 쌓기 딱 알맞은 크기야.”

우진은 바위를 무너진 담장 자리로 들고 가 척척 쌓아 올렸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주워 모아 무량생기공의 진기를 손끝에 모아 쐐기처럼 박아 넣자, 흙과 돌이 자석처럼 단단하게 맞물리며 빈틈없는 석벽으로 재탄생했다. 쿵! 쿵! 쿵!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순식간에 높이 반 장에 달하는 튼튼한 돌담이 마당을 빙 둘러 완성되었다.

“후우, 땀이 기분 좋게 나는구나.”

우진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이번엔 본채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기울어진 솟을대문과 썩어가는 기둥들. 그리고 뚫린 지붕.

우진은 뒤뜰로 걸어가 산자락에 곧게 뻗은 아름드리 참나무 몇 그루를 살펴보았다.

“사부님 계실 땐 하루에 백 그루씩 맨손으로 베어 넘겼는데, 도장 수리에는 서너 그루면 충분하겠어.”

스악!

우진의 손날이 허공을 갈랐다. 무량생기공의 날카로운 생기(生氣)가 손끝에서 뿜어져 나와 도끼날보다 예리한 장풍을 형성했다.

쩍! 쩌적!

거대한 참나무 밑동이 깔끔하게 잘려 나가며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우진은 쓰러진 통나무를 번쩍 짊어지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손톱과 손날을 이용해 껍질을 순식간에 벗겨내고, 정교하게 홈을 파서 완벽한 기둥과 서까래 재목으로 다듬어냈다.

쿵! 쾅!

우진은 몸을 솟구쳐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부러진 서까래를 걷어내고 새 통나무를 단숨에 끼워 맞춘 뒤, 산비탈에서 주워 온 납작한 점판암 암석들을 손바닥으로 얇게 쪼개어 기와 대신 지붕에 촘촘히 얹었다.

발을 헛디디면 지붕이 무너져 떨어질 법도 했지만, 우진의 신형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허공을 밟고 허공에 머무는 답설무흔의 신법이 지붕 수리라는 노역 속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사부님이 보셨으면 지붕 고치는 것도 훌륭한 신법 수련이라며 칭찬하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