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학자가 망한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1회차

1회차 · 망한영주

죽음의 땅, 첫 번째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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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엘 아슈톤은 왕립 마법 연구소의 지하 서고에서 고대 문헌을 뒤적이다가, 갑작스레 날아든 급사 통보를 받고 북부 최전선으로 향했다. 부모님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다. '오염지대'의 경계에서 발생한 이례적인 마력 폭주였다. 채무를 일부 줄여주는 조건으로 던져진 영주직은 사실상 추방에 가까웠다.

마차 바퀴가 회색 지대의 거친 자갈길을 밟으며 덜컥거렸다. 창밖으로는 시든 숲과 잿빛 하늘이 끝없이 이어졌다. 카엘은 손가락을 튕겨 공중의 먼지를 걷어내는 소소한 정화 주문을 걸며 한숨을 쉬었다. 연구실의 은은한 촛불 대신, 여기는 차갑고 축축한 바람만이 가득했다.

"도착했군."

카엘이 내리자, 그의 뒤를 따라 한 여인이 가볍게 뛰어내렸다. 엘라 비숍. 원래는 카엘과 함께 봉인술의 이론적 기반을 연구하던 동료였으나, 그가 영지로 부임하자 곧장 짐을 싸서 따라온 인물이었다. 그녀는 낡은 가죽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엘라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투덜거렸다. 카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툭 쳤다.

"적응해야지. 이제 우리는 이 황량함의 주인이야."

영주의 저택이라 불리는 곳은 폐허 직전의 돌덩어리 집이었다. 지붕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벽면에는 검은 곰팡이가 번져 있었다. 그 중심에 초췌한 노인이 하나 서 있었다. 행정관 찰스였다.

"영주님. 그리고... 도련님의 친구분까지."

노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두꺼운 문서 뭉치를 카엘에게 건넸다.

"여기가 모든 장부입니다. 식량 재고는 삼 일 분. 병력은... 없습니다. 백성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카엘은 문서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숫자들이 붉은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빚, 세금, 마물 피해 보상금. 현실은 연구 노트보다 훨씬 잔혹했다.

"그림자는?"

"그들이 최근 마을 외곽에서 목격되었습니다. 전임 영주님께서는 토벌을 명령하셨지만..."

노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카엘은 문서를 덮고 엘라를 바라보았다. 엘라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으로 억압할 수 없는 상대. 그것이 이 땅의 진실이었다.

카엘은 장부를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연구실의 깔끔한 책상 대신 흙먼지 쌓인 탁자 위에는 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이 황량한 땅에 발을 디딘 지 불과 몇 시간.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기사부터 소집하라고 해라."

"엘라, 너는 문서 정리부터 하고. 나는 밖으로 나가겠다."

엘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잉크병을 꺼냈다. 카엘은 저택 현관을 나서자마자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회색빛 하늘 아래, 폐허가 된 마을 광장에는 초췌한 모습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며 서 있었다. 그들 앞에 선 세 명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이 영지의 모든 군사력이었다.

첫 번째는 거구의 사내였다. 이름은 브렌트. 낡은 갑옷을 걸쳤지만 눈빛만큼은 매서웠다. 두 번째는 날렵한 체구의 여성, 리나. 활을 등에 메고 있었다. 마지막은 가장 어린 남자, 토마스. 검을 들고 있었지만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전임 영주님 이후로 병력이 줄었습니다. 남은 건 우리 셋뿐입니다, 영주님."

"마물이 출몰하는 빈도가 늘고 있습니다. 식량이 없으면 백성들이 먼저 쓰러질 겁니다."

카엘은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공포와 절망, 그리고 미약한 기대.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냈다. 왕도에서 급하게 챙겨온 일주일분의 건조 식품과 약초였다.

"모두 모여라."

카엘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는 광장 중앙에 서서 보따리를 풀었다.

카엘은 보따리를 풀며 광장을 가득 메운 초췌한 백성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바삭한 빵과 말린 고기, 그리고 약초 포대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연구실에서는 마력 회로를 그리는 데 쓰이던 손이었지만, 지금은 생존을 위한 물자를 나누는 데 분주했다. 카엘은 가장 앞줄에 선 노인을 향해 한 덩이를 건넸다.

"드세요. 배고픔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되니까요."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빵을 받아 들었다. 뒤이어 아이들, 여성들, 그리고 기사들까지 줄을 서서 차례로 식량을 챙겨 갔다. 일주일분이라는 적은 양이었지만, 이 황량한 땅에서 처음 느껴보는 '나눔'이었다. 카엘은 마지막 조각까지 모두 나누어 준 뒤 빈 보따리를 접었다. 그의 주머니는 텅 비었지만, 광장에 드리운 그림자만큼은 전보다 옅어진 듯했다.

저녁 무렵, 영주 저택의 낡은 응접실에는 촛불 몇 개만이 간신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엘라가 정리해 온 장부들이 탁자 위에 쌓여 있었고, 브렌트와 리나, 토마스는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카엘은 창밖으로 보이는 잿빛 숲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급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는 왕립 연구소의 안락함을 버리고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더 이상 학자가 아닌 통치자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브렌트, 오늘 밤 순찰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브렌트가 단단한 갑옷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지만, 눈빛만은 흔들림 없었다.

"세 명이 돌아가며 경비를 설 겁니다. 다만, 마력 진동이 심해지는 새벽 시간대에는 위험합니다. 전임 영주님도 그때..."

브렌트는 말을 아꼈다.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책상 위 문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봉인술의 기초 원리가 적힌 두꺼운 양피지였다. 오염지대의 균열을 막아내는 핵심 기술이자, 부모님이 생전에 연구하던 주제이기도 했다.

"봉인술의 잔재가 아직 마을 외곽의 석주들에 남아 있겠군. 내일 아침, 직접 확인하러 가겠다."

리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위험합니다, 영주님. 그림자 발톱이 출몰하는 구역입니다."

카엘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내가 마법학자였다는 사실은 잊었나? 나는 그들과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대화하러 갈 거야."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엘라가 옆에서 노트를 덮으며 속삭였다.

"오빠, 무리한 계획은 제발 삼가. 우리는 이제 도망칠 곳이 없어."

"엘라. 공적인 자리에서는 영주님으로 부르도록."

카엘은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검은 비늘의 존재들이 숲속 어딘가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새벽의 잿빛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카엘은 말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전임 영주가 남긴 낡은 지도와 봉인술 관련 서적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엘라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따라나섰지만, 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여기서 장부를 더 정리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이 저택에서 나가면 안 돼."

그는 브렌트에게만 동행을 허락했다. 거구의 기사는 묵묵히 검을 챙겨 들며 카엘의 뒤를 따랐다. 마을 외곽으로 향하는 길은 황량했다. 시든 풀포기 사이로 검은 균열이 지면 위로 드러나 있었고, 공기 중에는 미약하지만 불쾌한 마력 진동의 잔향이 맴돌았다. 카엘은 코를 막으며 호흡을 조절했다. 연구실에서는 단순히 이론으로만 접했던 현상이, 피부로 와닿으니 오싹함이 밀려왔다.

"저기 있습니다."

브렌트가 말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숲속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키가 큰 석주 세 개가 반쯤 묻힌 채 서 있었다. 표면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그중 하나는 금이 간 채로 어두워져 있었다. 카엘은 말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손끝이 돌 표면에 닿자 차가운 냉기가 파고들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낯선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대 문명의 번영과 쇠퇴, 그리고 그림자 발톱들의 슬픈 눈동자.

"봉인술이 약해지고 있어. 이 석주가 완전히 무너지면, 오염지대의 경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몰라."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주변 나무들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렌트가 즉시 검을 뽑아 들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카엘은 그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림자 속 두 눈이 노랗게 빛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야생 짐승의 눈이 아니었다. 지적이고, 호기심 어린 눈이었다.

"나는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아. 다만,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왔을 뿐이야."

카엘은 손을 들어 브렌트의 검을 내리려 했다. 그림자 발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하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숲속 어둠이 요동치더니 형체가 드러났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팔다리가 지면을 긁으며 전진했고, 입에서는 이빨이 찢어질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들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브렌트가 외쳤다.

"영주님, 물러서십시오!"

그림자 하나가 카엘의 목을 향해 돌진했다. 카엘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연구실에서 익힌 최소한의 방어 마법이 공기 중의 먼지를 응집해 얇은 장벽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종이처럼 쉽게 찢어졌다. 거대한 몸집이 장벽을 밀어내고 카엘을 쓰러뜨릴 기세였다. 그 순간, 강렬한 파열음이 울렸다. 브렌트의 검이 그림자의 팔뚝을 정확히 베어냈고, 피 대신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상대는 하나만이 아니었다. 세 마리, 네 마리. 잿빛 안개 속에서 붉은 눈들이 점점 더 많이 떠졌다. 카엘은 바닥에 넘어진 채로 봉인술 서적을 움켜쥐었다. 페이지가 흙먼지 속에 빠졌지만, 그는 읽을 여유가 없었다. 그저 살려야 한다는 본능이 몸을 움직이게 했다.

"마력 진동이 심상치 않다!"

브렌트가 숨을 헐떡이며 카엘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의 갑옷에는 검은 상처가 번져 있었고, 검날은 무거워 보였다. 리나와 토마스가 멀리서 화살과 창을 들고 접근하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림자 발톱들은 인간들의 공포를 먹이 삼아 더욱 날카롭게 변해가고 있었다.

카엘은 떨리는 손으로 공중에 기하학적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정화 주문이 아닌, 공간 자체를 일시적으로 경직시키는 봉인술의 하위 응용. 고대 문헌에서 본 그 기호를 기억해야 했다. 뇌리에 스친 이미지들—석주의 금이 간 표면, 슬픈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섞여 들었다.

"멈춰!"

그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가 그린 룬 문자가 희미하게 빛났지만, 그림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마력의 흐름을 감지한 듯 더욱 격렬하게 공격해 왔다. 브렌트가 카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둘렀다.

"죽일 겁니다!"

검과 비늘이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카엘은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다. 학자는 현장을 통제하는 자가 아니라 기록하는 자였는데, 지금은 생존 자체가 기록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부모님이 생전에 강조하던 말. '봉인은 억제가 아니라 조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