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학자가 망한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2회차

2회차 · 망한영주

억제가 아니라 조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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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제가 아니라 조율이다.'

그 한 문장이 번개처럼 카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학자로서 책상머리에 앉아 외웠던 수백 가지 공식들이 지워졌다.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검은 괴수, 살을 에는 듯한 잿빛 바람, 그리고 부모님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씨름했던 그 기이한 마력의 진동.

지금 필요한 것은 공간을 억지로 틀어막는 거대한 족쇄가 아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날뛰는 파동의 주파수를 읽어 내고, 그 파동의 골과 마루 사이에 자신의 마력을 끼워 넣는 정밀한 간섭이었다.

카엘은 공중에 어설프게 띄워 놓았던 기하학적 룬 문자를 가차 없이 흩어버렸다.

"브렌트, 3초만 버텨 줘!"

"크윽, 명령대로!"

브렌트가 거대한 강철검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포효했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그림자 발톱 한 마리가 허공을 박차며 덮쳐왔다. 강철과 날카로운 손톱이 맞부딪치며 귓전을 찢는 파열음이 일었다. 브렌트의 육중한 몸이 반 걸음 뒤로 밀려났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투구 틈새로 굵은 땀방울이 튀었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카엘은 두 눈을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자 피부에 닿는 오염지대의 불쾌한 박동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쿵, 쿵, 쿵. 마치 대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듯한 불규칙한 진동. 그 진동이 그림자 발톱들의 신경을 긁어 광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카엘은 심장 부근의 마력 핵을 가볍게 회전시켰다. 연구소에서 늘 쓰던 방식대로 매끄럽고 단정한 마력이 아니라, 거칠게 요동치는 주변의 마력 파형에 맞추어 자신의 파장을 일그러뜨렸다. 일종의 역위상 파동이었다.

그의 오른손 끝에서 푸르스름한 빛 대신 옅은 잿빛을 띤 마력의 고리가 피어올랐다.

"흩어져라."

카엘이 손바닥을 활짝 펴며 전방을 향해 밀어냈다.

투명한 파문이 허공을 가르며 퍼져 나갔다. 브렌트를 몰아붙이던 그림자 발톱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딱 멎었다. 그들의 붉은 눈동자에서 일렁이던 살의가 흐릿해지며, 맹렬하던 근육의 긴장이 맥없이 풀렸다. 자신들을 지탱하고 자극하던 마력의 진동이 카엘의 간섭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상쇄된 탓이었다.

"지금이다!"

브렌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회전과 함께 묵직한 대검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선두에 섰던 그림자 발톱의 목덜미가 깊게 베였다. 붉은 피 대신 짙은 검은색 안개가 상처 부위에서 뿜어져 나왔다. 괴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뒤이어 덤벼들려던 두 번째 개체 역시 카엘이 쏘아 보낸 작은 충격파에 중심을 잃었고, 브렌트의 단검이 그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나머지 두 마리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듯 뒤로 물러섰다. 잿빛 안개 속에서 붉은 눈동자들이 흔들리더니, 이내 숲속의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하아, 하아... 해치운 겁니까?"

브렌트가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갑옷 표면은 검은 연기에 그을려 있었고, 대검의 날은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었다.

"완전히 끝난 건 아니야. 쫓아낸 것뿐이지."

카엘은 안도할 틈도 없이 곧장 금이 간 석주로 달려갔다. 지면을 타고 올라오는 마력 진동은 여전히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석주의 균열 틈새로 보랏빛 안개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브렌트, 경계를 늦추지 마. 이 석주를 수습하지 않으면 놈들이 동료를 더 데리고 돌아올 거야."

카엘은 품에서 낡은 봉인술 서적을 꺼낼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석주의 표면에 맨손을 얹었다.

손바닥을 통해 얼음장 같은 냉기와 함께 끔찍하게 뒤틀린 마력이 전신을 타고 흘러들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당장 손을 뗐을 만한 오염의 감각이었지만, 카엘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는 조금 전 터득한 조율의 감각을 다시 끌어올렸다. 자신의 마력을 아주 얇은 실처럼 뽑아내어, 부서진 룬 문자의 궤적을 따라 밀어 넣었다. 억지로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끊어진 회로를 다시 잇는 작업이었다.

푸른빛의 마력선이 깨진 돌 틈을 타고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지직, 지지직.

마치 불꽃이 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석주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카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턱 끝으로 떨어졌다. 마나의 소모가 극심했다. 연구실에서 수식이나 풀던 학자의 마나 통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시야가 핑 돌며 뇌수가 조여드는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어지면 돼.'

카엘은 혀를 깨물며 정신을 다잡았다. 마지막 끊어진 교차점에 마력의 쐐기를 박아 넣는 순간, 석주 전체에서 눈부신 백색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웅- 하는 낮은 공명음과 함께 대지를 뒤흔들던 불쾌한 진동이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석주 표면의 균열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틈을 메운 푸른 마력의 빛줄기가 단단한 흉터처럼 굳어져 있었다.

"후우... 임시방편이지만, 당분간은 버텨줄 거다."

카엘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냈다.

그때, 저 멀리 숲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화살을 시위에 잰 리나와 창을 꼬나쥔 토마스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영주님! 브렌트 님! 무사하십니까?"

"괘, 괜찮으신 겁니까?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카엘은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짐짓 태연한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다시피 멀쩡해. 자네들이 올 때까지 브렌트와 내가 숲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지."

"허풍이 심하십니다, 영주님. 목숨이 서너 번은 왔다 갔다 했습니다."

브렌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 속에서도 카엘을 향한 은근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마법사들이 흔히 쓰는 거창한 주문도 없이, 기괴한 괴수를 쫓아내고 고대의 봉인석을 맨손으로 안정시킨 광경은 평생 칼만 쥐어본 무부에게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카엘은 쓰러진 그림자 발톱의 사체로 다가갔다. 검은 연기가 흩어지며 괴수의 육신은 형체도 없이 사위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괴수가 쓰러져 있던 자리, 질척한 흙더미 한가운데에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손바닥 절반만 한 크기의 불규칙한 결정체였다.

검붉은 빛과 짙은 보랏빛이 뒤섞인 채,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미약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이건 뭐지?"

카엘이 손을 뻗으려 하자, 뒤따라온 리나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만지지 마십시오, 영주님! 오염된 잔재입니다!"

"그렇습니다. 변종 괴수들이 죽을 때 드물게 남기는 찌꺼기인데, 저것에 오래 노출되면 마력 중독으로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들었습니다. 당장 흙으로 덮어버려야 합니다."

기사들의 경고는 절박했다. 변경의 사람들에게 오염지대의 산물은 그 자체로 저주이자 재앙이었다.

하지만 카엘의 눈은 달랐다. 학자로서의 호기심과 분석 본능이 번뜩였다. 그는 품에서 두꺼운 연구용 손수건을 꺼내 결정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손수건 너머로 차가우면서도 찌릿한 마력의 파동이 전해졌다.

'중독을 일으키는 찌꺼기라고? 아니야. 이 파동은...'

결정 내부에서 느껴지는 힘의 밀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다만 그 힘이 끔찍하게 뒤틀리고 엉켜 있어서, 보통의 생명체가 접촉하면 체내의 마력 순환을 망가뜨리는 것뿐이었다.

"챙겨가겠다."

"영주님!"

"연구해 볼 가치가 있어. 브렌트, 우리는 지금 삼 일 뒤면 굶어 죽을 처지야. 돌멩이 하나, 풀뿌리 하나라도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면 이 영지는 끝장이다."

카엘의 단호한 목소리에 기사들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빚더미에 올라앉아 굶주림에 허덕이는 영지. 그들에게는 위험을 피할 여유조차 없다는 현실을 카엘은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돌아가자. 저택에 가서 확인해야 할 게 아주 많아."

카엘은 조각을 품에 단단히 갈무리하고 말에 올랐다.

영주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마을의 풍경은 새벽보다 더 침울했다.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영민들은 카엘 일행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웅성거렸다. 기사들의 갑옷에 묻은 검은 얼룩과 피비린내를 맡은 사람들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어제 카엘이 나누어준 건조 식품 덕에 당장의 굶주림은 면했으나, 그들의 미래는 여전히 잿빛 하늘처럼 어두웠다.

저택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낡은 로브를 걸친 전임 행정관이 허겁지겁 마중을 나왔다.

"영주님! 무사하셨습니까! 외곽 석주 쪽에서 굉음이 들려 모두가 가슴을 졸였습니다!"

노인의 등 뒤로 엘라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카엘의 안색을 살피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다친 데는 없어? ...아니, 영주님, 무모한 짓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보다시피 사지는 멀쩡해. 엘라, 내 집무실로 와라. 자네에게 보여줄 게 있어."

카엘이 외투를 벗어 던지며 계단을 오르려 하자, 전임 행정관의 시선이 카엘의 허리춤에 닿았다. 손수건에 싸여 있음에도 새어 나오는 음산한 검붉은 기운을 노인은 단박에 알아챘다.

"힉! 영, 영주님! 그, 그것은 설마... 오염의 결정입니까?"

노인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문가에 서 있던 하인 하나가 비명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당장 버리셔야 합니다! 전임 영주님 시절에도 저 흉물을 만졌던 광부들이 며칠 만에 온몸의 혈관이 터져 죽었습니다! 저택에 들이시면 안 됩니다! 영지에 저주가 내립니다!"

"진정하세요, 행정관."

카엘이 차분한 어조로 노인의 어깨를 짚었다. 호감 가는 인상에 어우러진 부드러운 미소가 노인의 공포를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저주는 무지에서 오는 법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잊으셨습니까? 왕립 마법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었던 카엘 아슈톤입니다. 독도 다루는 법을 알면 약이 되는 법이지요. 내가 책임질 테니, 백성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카엘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행정관은 입을 다물었다. 귀족 특유의 오만함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명확한 논리가 담긴 목소리였다.

카엘은 엘라를 데리고 2층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는 엘라가 정리해 둔 낡은 장부들과 마법 시약병 몇 개, 그리고 양피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카엘은 탁자 한가운데의 양피지를 치우고, 손수건에 싸인 검붉은 결정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손수건을 펼치자, 탁자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서늘해졌다.

"...이건, 오염지대의 변종 생물에게서 추출한 마력 응집체잖아?"

엘라의 눈빛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그녀는 낡은 안경을 고쳐 쓰며 가방에서 작은 확대경과 마력 감응 깃펜을 꺼냈다. 카엘과 수년간 연구를 함께해 온 동료답게, 위험성보다는 학술적 호기심이 앞서는 눈치였다.

"그림자 발톱을 처치하고 얻었어. 놈들이 소멸할 때 이게 남더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력 밀도가 높아. 하지만... 파형이 완전히 망가져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