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1회차

1회차 · 샤인

호랑이 굴에 발을 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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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아홉 시 삼십 분, 김자작의 인생 그래프는 정확히 90도 각도로 수직 낙하했다.

사유는 명쾌하고도 비참했다. 회사 매출의 80퍼센트를 견인하던 전무가 회삿돈을 몽땅 들고 베트남으로 야반도주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것은 직원 여덟 명의 코 묻은 월급과 3개월 치 밀린 사무실 임대료, 그리고 탕비실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믹스커피 세 봉지가 전부였다.

"자작 씨,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이건 회사의 위기이자, 자작 씨 개인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절호의 기회야."

유리창 너머로 빤히 보이는 강남대로를 등진 채, 대표 박상태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수건으로 훔치며 지극히 철학적인 표정을 지었다. 말은 번지르르했으나 요약하자면 한 문장이었다. ‘권고사직서에 도장 찍고 오늘 안으로 꺼져 달라.’

자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직서 양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백지 위에 검은 글씨로 인쇄된 '일신상의 사유'라는 다섯 글자가 몹시도 낯설었다.

"대표님."

"응, 자작 씨. 마음 아프지만 우리 서로 쿨하게……."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건 참 좋은데요. 제 지난달 월급이랑 퇴직금은 어느 세상에서 찾아야 하나요? 저승인가요?"

"자, 자작 씨. 말이 너무 험하네. 내가 회사를 살려서 반드시, 꼭 계좌로 쏴 준다니까? 내가 자작 씨를 얼마나 아꼈는데 그래. 우리 자작 씨는 성격도 밝고, 얼굴도 예쁘고, 어디 가도 굶어 죽진 않을 상이잖아."

"얼굴 예쁜 걸로 월세를 낼 수 있었으면 제가 진작에 건물주가 됐겠죠, 대표님."

자작은 생긋 웃었다. 눈꼬리는 사근사근하게 접혔으나, 동공 깊은 곳에서는 푸른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김자작, 스물여덟 살.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고 혈혈단신 상경하여 중소 광고대행사 '미르 커뮤니케이션'에 입사한 지 3년 차. 카피라이팅부터 클라이언트 비위 맞추기, 야근용 컵라면 끓이기, 대표가 술 취해 잃어버린 외투 찾아오기까지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하며 버텨 온 세월이었다. 그녀의 특기는 긍정적인 현실 도피와 어디서든 싹싹하게 웃는 푼수 같은 처세술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뇌의 이성이 단단히 퓨즈를 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대표님, 아까부터 넥타이에 짜장면 소스 묻으셨어요."

자작이 무심하게 턱짓으로 가리키자, 박 대표는 화들짝 놀라며 제 넥타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틈을 타 자작은 대표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최고급 수제 만년필을 슬쩍 손가락으로 낚아채 제 카디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밀린 월급의 100분의 1도 안 되지만, 일단 압류다.'

자작은 펜을 챙긴 손으로 볼펜을 쥐고 사직서에 일필휘지로 이름을 갈겨썼다. 서명란에 아주 정성스럽게 혓바닥을 쏙 내민 이모티콘까지 그려 넣은 뒤 종이를 대표 앞으로 밀어냈다.

"그동안 더러웠고, 다신 마주치지 말죠. 만약 제 통장에 다음 주까지 퇴직금 안 들어오면, 노동청이 아니라 대표님 사모님 번호로 다이렉트 전화 걸 겁니다. 지난달에 ‘거래처 미팅’ 간다고 하시고 저랑 같이 간 룸살롱 영수증, 제가 아직 결재 서류철에 고이 모셔뒀거든요."

"김, 김자작 씨! 그거는 오해라고 내가……!"

"그럼 번창하세요, 전 대표님."

자작은 의자를 드르륵 밀고 일어나 90도로 깍듯하게 인사했다. 당당하게 대표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그녀의 뒷모습은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했으나, 사무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다리가 풀려 벽을 짚어야 했다.

"망했다. 진짜 망했어."

사무실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디자이너는 모니터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고, 기획팀 대리는 탕비실의 카누 보급형 상자를 쇼핑백에 쓸어 담고 있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각자 구명조끼를 챙기는 모양새였다.

자작은 자리로 돌아와 커다란 다이소 노란색 바구니에 제 짐을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먼지 쌓인 가습기, 3년 전 입사 첫날 샀던 핑크색 슬리퍼, 야근할 때마다 뜯어먹던 비타민 젤리, 모니터 모퉁이에 붙어 있던 ‘칼퇴는 나의 힘’ 포스트잇까지. 3년이라는 청춘의 무게가 고작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에 차곡차곡 담겼다.

"자작 씨…… 진짜 가?"

옆자리에서 카누를 챙기던 최 대리가 붉어진 눈으로 다가왔다.

"네, 대리님. 배가 가라앉을 때는 제일 먼저 뛰어내리는 쥐가 생존 확률이 높대요."

"흑, 맞아. 자작 씨는 어딜 가도 사랑받을 거야. 성격도 좋고, 일도 잘하고……."

"알면 카누 다섯 포만 줘요. 저 이제 백수라 믹스커피 사 먹을 돈도 없어요."

자작은 최 대리의 쇼핑백에서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카누 열 포를 낚아채 제 바구니에 쑤셔 넣었다. 푼수처럼 굴며 넉살을 부렸지만, 가슴속 한구석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휭휭 불어닥쳤다.

회사를 나서는 발걸음은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거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와 유리문을 밀고 나서는 순간, 강남의 매서운 늦가을 칼바람이 자작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화려한 빌딩 숲, 깔끔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채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그 틈바구니에서 자작은 핑크색 삼선 슬리퍼가 삐져나온 노란 바구니를 품에 안고 멍하니 서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 거야?"

하늘은 야속할 정도로 맑고 푸르렀다. 자작은 코를 훌쩍이며 바구니를 고쳐 안았다. 불쌍해 보이면 안 된다. 절대로 찌질해지면 안 된다. 비록 통장 잔고는 십사만 삼천 원뿐이고, 내일 아침부터 갈 곳 없는 백수 신세가 되었지만, 김자작은 김자작이었다.

"그래, 어차피 그 꼰대 밑에서 뼈 묻을 생각도 없었잖아? 이건 기회야. 신이 나를 더 큰 물로 보내기 위한 큰 그림인 거지!"

자작은 가슴을 활짝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힘차게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보도블록 틈새에 구두굽이 정확하게 끼어버렸다.

"어, 어어?"

중심을 잃은 자작의 몸이 앞으로 쏠렸고, 품에 안고 있던 노란 바구니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사무용품들이 마치 축제의 꽃가루처럼 화려하게 허공에 흩뿌려졌다. 가습기는 아스팔트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플라스틱 뚜껑이 박살 났고, 카누 스틱 열 포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구두 앞코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대표실에서 슬쩍해 온 명품 만년필이었다. 만년필은 포물선을 그리며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마침 신호 대기로 멈춰 서 있던 검은색 최고급 세단의 바퀴 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내 퇴직금……!"

자작은 무릎을 꿇은 채 절규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완벽한 비극이자, 눈물겨운 코미디의 한 장면이었다. 자작은 얼른 기어가 만년필을 구출하려 했으나, 신호가 바뀌자마자 육중한 검은색 세단은 가차 없이 만년필을 '빠드득' 짓밟으며 미끄러지듯 출발해 버렸다. 산산조각 난 만년필의 잔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자작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부서진 플라스틱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던 회사원들이 힐끔거리며 혀를 찼다. ‘쯧쯧, 첫날부터 잘렸나 봐.’ 속닥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평소 같았으면 벌떡 일어나 ‘구경값 받습니다!’ 하고 너스레를 떨었겠지만, 지금은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김자작, 너 오늘 진짜 액땜 제대로 한다."

자작은 입술을 꽉 깨물고 바닥에 흩어진 짐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눈물이 찔끔 솟구쳤지만 소매로 벅벅 문질러 닦아냈다. 길바닥에서 울면 진짜 지는 거였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코앞에 카누 스틱 두 개를 내밀었다.

"저기요. 이거 떨어뜨리셨는데."

단정하게 다려진 슬랙스에 고급스러운 로퍼를 신은 남자였다. 올려다보니 훤칠한 키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뒤편으로 조금 전 자작의 만년필을 밟고 지나갔던 검은색 세단이 비상깜빡이를 켜고 멈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 감사합니다."

자작이 얼떨결에 카누를 받아들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차가 출발하면서 밟은 물건,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연락 주시죠."

자작은 명함을 멍하니 받아들었다. 두껍고 묵직한 고급 한지에 은박으로 박힌 글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태산그룹 전략기획본부 총괄실]

이름도 적혀 있지 않고 직함과 전화번호만 덩그러니 박힌 기묘한 명함이었다. 태산그룹이라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재계 1위의 거대 기업 아니던가.

"어…… 저기요, 이거 만년필 값이 꽤 나가는 거긴 한데요."

자작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 세단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뒷좌석 문을 열고 타기 직전, 차창이 스르륵 내려가며 짙은 선팅 너머로 서늘한 눈매를 가진 한 남자의 옆얼굴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조각처럼 날카로운 턱선과 숨이 막힐 만큼 단정한 수트 핏. 차는 다시 매끄럽게 도로를 미끄러져 나갔다.

"뭐야, 저 재벌 3세 코스프레는?"

자작은 손에 쥔 명함과 찌그러진 카누 스틱을 번갈아 보았다.

비극의 한복판에 뚝 떨어진 뜬금없는 명함 한 장. 그러나 당장 굶어 죽게 생긴 백수에게 재벌가의 명함 따위는 배부른 소리였다. 자작은 명함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마침내 수습한 노란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지하철역을 향해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 * *

서울 봉천동 언덕길 꼭대기, 보증금 500에 월세 40만 원짜리 옥탑방.

자작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바구니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대자로 뻗어버렸다. 장판 바닥의 서늘한 기운이 등판을 타고 올라왔다. 천장에 붙은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처량한 빛을 냈다.

"아아아악! 망했다! 진짜 망했다고!"

자작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발버둥을 치다 보니 서러움이 밀려왔다.

스물다섯에 서울로 올라와 3년 동안 뼈 빠지게 일했다. 남들 연애하고 쇼핑할 때, 자작은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며 엑셀 파일과 씨름했다. 언젠가는 내 손으로 멋진 광고 캠페인을 만들겠다는 당찬 꿈이 있었다. 칸 광고제에서 드레스를 입고 수상 소감을 말하는 상상을 하며 버텼던 밤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결과가 고작 월급 떼인 백수라니.

꼬르륵.

비극적인 타이밍에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렸다.

자작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슬퍼도 배는 고팠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유통기한이 사흘 지난 두부 반 모와 신김치, 그리고 먹다 남은 소주 반 병이 전부였다.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더라."

자작은 냄비에 물을 붓고 신김치와 두부를 몽땅 털어 넣었다. 조미료를 팍팍 친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그럴싸한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찌그러진 양은냄비를 상에 올리고, 소주잔 대신 밥공기에 소주를 콸콸 따랐다.

자작은 소주 한 모금을 털어 넣고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크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쓰고 텁텁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묘하게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불덩이가 사그라지는 기분이었다.

"신데렐라도 구박받다가 왕자님 만났잖아. 난 구박은 충분히 받았으니까 이제 왕자님만 나오면 되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작은 핸드폰을 켰다. 취업 포털 사이트 앱을 켜자 수많은 구인 공고가 떴지만, 하나같이 ‘경력 5년 이상’, ‘관련 학과 석사 우대’, ‘외국어 능통자’ 따위의 숨 막히는 조건들뿐이었다.

"다들 경력자만 찾으면 나 같은 3년 차 애송이는 어디서 경력을 쌓으라는 거야? 경력 낳는 자판기라도 있나?"

자작은 투덜거리며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마구 쓸어내렸다.

그때, 화면 상단에 팝업 알림 하나가 번쩍 떴다.

[태산그룹 하반기 경력 및 특별 채용 공고 : 기획조정실 총괄 서포트팀]

태산그룹?

아까 길바닥에서 받았던 명함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자작은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명함을 꺼냈다. [태산그룹 전략기획본부 총괄실].

"설마…… 이게 그 운명이라는 건가?"

자작의 눈이 반짝였다. 푼수 같은 긍정 회로가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고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지원 자격이 기묘했다.

‘학력 무관, 전공 무관, 유관 업무 2년 이상 유경험자. 단,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고 상황 적응력이 우수한 자. 멘탈이 강철 같은 자 우대.’

"이거 완전 내 얘기잖아?"

자작은 무릎을 탁 쳤다.

전무가 야반도주한 회사에서 대표 멱살을 잡고 만년필을 털어 나온 위기 대처 능력, 길바닥에 짐이 쏟아져도 카누 열 포를 챙겨 온 강철 멘탈. 김자작 말고 이 자리에 어울리는 인재가 대한민국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채용 공고 하단에 적힌 연봉 앞자리를 본 순간, 자작의 턱이 떡 벌어졌다.

‘기본급…… 0이 몇 개야? 미르 커뮤니케이션의 세 배?’

눈이 뒤집힌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자작은 술기운과 오기가 뒤섞인 맹렬한 기세로 노트북을 켰다.

"박상태 대표, 보고 있나? 내가 태산에 입사해서 네놈 회사 빌딩째로 사버릴 테니까 딱 기다려!"

자작은 취업 포털 사이트의 자기소개서 입력 창을 열었다.

평소라면 쓰지 않았을 과감하고 솔직한 문장들이 취기에 힘입어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렸다.

[귀사에서 찾고 있는 '강철 멘탈'이 바로 저 김자작입니다. 저는 망해가는 회사에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대표의 멘탈을 케어했고, 돌발 상황에서도 한 톨의 자원(카누 10포)을 낭비하지 않는 철저한 실리주의자입니다. 태산이라는 거대한 바위 위에 저라는 잡초를 심어주신다면, 바위를 뚫고 꽃을 피워내는 기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자기소개서를 다 쓰고 나니 새벽 한 시였다. 소주 반 병을 싹 비운 자작은 흐릿한 눈으로 ‘제출하기’ 버튼을 꾹 눌렀다.

[지원이 정상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초록색 완료 창을 보며 자작은 헤벌레 웃었다.

"합격하면 진짜 대박이고, 떨어지면…… 뭐, 내일 알바천국 뒤지면 되지!"

자작은 노트북을 덮고 그대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실직의 충격과 알코올의 기운, 그리고 막연한 희망이 뒤섞여 꿈나라로 빠져드는 속도는 빛보다 빨랐다.

* * *

이틀 뒤, 아침 열 시.

자작은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백수의 특권은 늦잠과 헐렁한 트레이닝복이었지만, 이틀째가 되니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 오던 참이었다. 전 직장 대표는 예상대로 연락을 씹고 잠수를 탔고, 노동청에 신고서를 접수하러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지이잉- 지이잉-

식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번호는 '02-700-XXXX'. 서울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였다. 스팸인가 싶어 끊으려다가, 자작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김자작 씨 되십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단정하고 차분했다. 마치 고급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음성 같았다.

"네, 제가 김자작인데요. 누구시죠?"

"태산그룹 전략기획본부 인사팀입니다. 김자작 씨께서 지원하신 기획조정실 총괄 서포트팀 서류 전형에 합격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순간 자작의 손에 들려 있던 라면 스프 봉지가 냄비 밖으로 툭 떨어졌다.

"네? 서, 서류요? 제가요?"

"네. 오늘 오후 두 시에 1차 면접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태산 본사 32층 대회의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저기, 담당자님! 오늘 오후 두 시요? 지금 열 시 반인데요?!"

"총괄본부장님의 특별 지시로 면접 일정이 긴급하게 잡혔습니다. 참석이 어려우시면 자동으로 불합격 처리됩니다."

"아닙니다! 갑니다! 가요! 지금 당장 날아가겠습니다!"

자작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전화가 뚝 끊겼다. 자작은 핸드폰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서류 합격? 내가 쓴 그 술주정 같은 자기소개서가 통과했다고? 그것도 대한민국 1위 기업인 태산그룹에서?

"김자작, 미쳤어! 대박이야!"

자작은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방 안을 방방 뛰기 시작했다. 옥탑방 바닥이 쿵쿵 울리며 먼지가 풀썩 날렸지만 상관없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시계를 보니 10시 35분이었다. 면접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세 시간 반. 봉천동에서 태산그룹 본사가 있는 광화문까지 가려면 지하철로 40분은 족히 걸렸다.

"옷! 옷이 어디 있더라?!"

자작은 장롱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나 3년 동안 야근용 후드티와 밴딩 슬랙스만 입고 살았던 그녀의 옷장에 ‘대기업 면접용 정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걸려 있는 것이라곤 대학교 졸업식 때 입었던 어깨 뽕이 잔뜩 들어간 남색 재킷과, 무릎이 늘어난 검정 스커트뿐이었다.

"이거라도 입어야 해!"

자작은 허겁지겁 남색 재킷에 팔을 쑤셔 넣었다. 3년 전보다 살이 조금 붙은 탓에 단추를 잠그자 숨이 턱 막혀왔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화장대 거울을 보며 틴트를 입술에 벅벅 발랐다. 아이라인을 그리려다 손이 떨려 꼬리가 짝짝이로 올라갔지만, 자작은 씩씩하게 볼을 찰싹 때리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괜찮아, 김자작. 넌 프로야. 비록 짝퉁 정장에 짝짝이 아이라인이지만, 네 안의 열정은 진짜라고!"

노란 바구니 옆에 뒹굴고 있던 검은색 기본 구두를 꿰어 신고, 자작은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 *

오후 한 시 사십 분, 광화문 한복판.

자작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태산그룹 사옥 앞에 섰다.

통유리로 뒤덮인 거대한 마천루는 그 위용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했다. 로비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완벽하게 피팅된 수트를 입고, 손에는 태블릿이나 서류철을 든 채 차가운 도시의 냄새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자작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을 폈다. 단추가 팽팽하게 당겨졌지만 굴하지 않았다.

"좋아,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댔어."

안내 데스크에서 면접자 신분증을 확인받고 32층으로 향하는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작은 거울을 보며 미소를 연습했다.

‘안녕하십니까, 지원자 김자작입니다! 하하, 호호.’

32층에 도착하자, 정적이 흐르는 고급스러운 복도가 펼쳐졌다. 바닥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면접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서너 명의 지원자가 앉아 있었다. 자작은 숨을 헉 들이켰다.

지원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명품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고, 손목에는 번쩍이는 시계가 둘러져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조용한 대화가 자작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이번에 컬럼비아 MBA 마치고 바로 지원했어요."

"아, 저는 보스턴 컨설팅에서 3년 구르다 왔는데, 총괄본부장님이 워낙 까다로우시다고 해서 걱정이네요."

자작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컬럼비아? 보스턴? 나만 봉천동 옥탑방 출신이야?’

자작은 슬그머니 구석 자리에 가 앉았다. 남색 재킷의 뽕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아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기죽지 마, 김자작! 쟤들은 믹스커피 심부름도 안 해봤을 테고, 도망간 전무 뒤치다꺼리도 안 해봤을 거 아냐? 현장 실무는 내가 최고라고!’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인사팀 직원이 들어왔다.

"김자작 지원자님, 면접실로 입장해 주십시오. 이번 면접은 1 대 1 심층 면접으로 진행됩니다."

"네! 갑니다!"

자작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기실에 있던 다른 지원자들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자작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면접실을 향해 걸어갔다.

육중한 원목 문이 열리고, 자작은 넓고 웅장한 면접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통창 너머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방이었다. 긴 테이블 중앙에 면접관 한 명이 홀로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흑발,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실루엣의 차콜 그레이 쓰리피스 수트. 그리고 서류를 넘기는 길고 곧은 손가락.

‘어……? 어디서 많이 본 실루엣인데?’

자작이 멍하니 서 있자, 면접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자작의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오똑한 콧날과 서늘한 입매, 그리고 남자의 책상 한구석에 놓인 투명한 아크릴 상자. 그 상자 안에는 아스팔트 바닥에서 처참하게 짓밟혀 산산조각 난 ‘박 대표의 만년필 잔해’가 예술품처럼 고이 전시되어 있었다.

"김자작 씨."

남자의 입술이 나직하게 열렸다. 낮게 깔리는 매력적인 저음이었으나, 그 안에는 서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내 차 바퀴 밑에 만년필을 밀어 넣고, 당당하게 변상 명함을 챙겨간 뒤, 술주정 같은 자기소개서를 보낸 패기가 꽤 인상적이더군요."

자작의 턱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강남 한복판에서 마주쳤던 그 검은색 세단의 주인, 대한민국 재계 1위 태산그룹의 후계자이자 악명 높은 전략기획본부 총괄본부장, 강태욱이었다.

"어…… 어?"

자작의 입에서 푼수 같은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대신 박살 난 만년필로 시작된, 김자작의 눈물겹고도 파란만장한 대기업 생존기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깍지 낀 손을 턱 밑에 괴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앉으시죠, 김자작 씨. 강철 멘탈이 바위를 뚫는 기적을 어떻게 보여줄 건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