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2회차

2회차 · 샤인

단추와 카누의 기적

이 글에는 생성형 AI 가 쓴 부분이 있습니다 자세히

면접실 안의 공기는 마치 영하 수십 도의 냉동고에 갇힌 것처럼 서늘했다.

김자작은 팽팽하게 당겨진 남색 재킷의 앞단추를 무의식중에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살이 쪄서 단추가 터지기 직전인 것도 문제였지만, 정면에 앉아 있는 남자의 시선이 그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저 사람이 왜 저기서 나와? 아니, 저 박살 난 만년필은 왜 저기 고이 모셔져 있는 건데?!’

자작의 동공이 사정없이 지진을 일으켰다.

책상 위에 다소곳이 놓인 투명 아크릴 상자 안에는 엊그제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산산조각 났던 박 대표의 명품 만년필 잔해가 처참한 몰골로 들어 있었다. 그걸 예술품이라도 감상하듯 곁에 두고 앉아 있는 남자, 강태욱 총괄본부장의 얼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냉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안 앉습니까? 내 방 바닥에 발을 붙여놓은 채로 면접을 볼 생각입니까?"

태욱의 나직하고 차가운 음성이 텅 빈 대회의실을 울렸다.

"아, 아닙니다! 앉습니다! 당장 착석하겠습니다!"

자작은 허둥지둥 의자로 다가가 엉덩이를 걸쳤다. 푹신한 최고급 가죽 의자였으나, 마치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처럼 엉덩이가 따끔거렸다. 자작은 무릎 위에 주먹을 가지런히 올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어깨의 과도한 패드 덕분에 자세는 군인처럼 각이 잡혔지만,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한 줄기 주르륵 흘러내렸다.

태욱은 책상 위에 놓인 자작의 입사지원서를 긴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김자작 지원자."

"네! 지원자 김자작, 부르심에 성심성의껏 응답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컸다. 대회의실 벽을 타고 쩌렁쩌렁 메아리가 쳤다.

태욱의 짙은 눈썹 한쪽이 살짝 꿈틀했다. 그는 서류철을 천천히 넘기며 입을 열었다.

"소개서가 참으로 흥미롭더군요. ‘망해가는 회사에서 대표의 멘탈을 케어했다’, ‘한 톨의 자원도 낭비하지 않는 철저한 실리주의자다’. 심지어 그 자원의 예시로 믹스커피 열 포를 당당히 기재했더군요."

태욱의 서늘한 시선이 자작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이게 태산그룹 전략기획본부에 지원하는 지원자의 정상적인 지원 동기라고 생각합니까? 장난으로 쓴 겁니까,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겁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보통의 지원자라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거나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을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김자작은 산전수전 공중전, 나아가 야반도주한 전무와 임금체불 대표 밑에서 3년을 구른 잡초였다.

창피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여기서 밀리면 다시 봉천동 옥탑방에서 사흘 지난 두부나 끓여 먹어야 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뻔뻔해야 산다.’

자작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세상에서 가장 싹싹하고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아침에 짝짝이로 그린 아이라인 탓에 한쪽 눈만 유난히 매서워 보였지만 말이다.

"면접관님,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정정해도 되겠습니까?"

"정정?"

"네. 저는 장난으로 쓰지도 않았고, 제정신이 아니지도 않습니다. 그건 제 3년의 직장 생활에서 우러나온 지극히 사실적인 ‘전투 일지’이자, 위기 극복의 핵심 지표를 요약한 데이터입니다."

태욱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듯 가늘어졌다.

"전투 일지? 믹스커피 열 포 챙긴 게 위기 극복의 데이터다?"

"그렇습니다. 기업이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달랐습니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도 회수 가능한 자원의 가치를 즉각 계산했고, 탕비실에 방치되어 손실 처리될 뻔한 유동 자산, 즉 카누 열 포를 100퍼센트 안전하게 회수했습니다."

"……유동 자산?"

태욱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바람이 샜다.

"네! 또한 만년필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작은 아크릴 상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푼수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와 당당한 억양이 튀어나왔다.

"회사가 망해 퇴직금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저는 대표의 동산(動産) 중 가장 환금성이 높은 최고급 만년필을 현물 담보로 확보했습니다. 비록 불의의 교통사고…… 아니, 면접관님의 차 바퀴에 의해 파손되는 손실이 발생했으나, 저는 그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가해 차량 측으로부터 '손해배상 약정 명함'이라는 대체 채권을 확보했습니다."

자작은 가슴을 쫙 펴며 결론을 내렸다.

"즉, 위기 발생 인지, 즉각적인 담보 확보, 자산 손실 시 대체 청구권 획득까지. 저는 단 5분 만에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수행해 낸 것입니다!"

대회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면접관 강태욱은 턱을 괸 채 멍하니 자작을 바라보았다. 궤변도 이런 상궤변이 없었고, 뻔뻔함도 이런 철면피가 없었다. 믹스커피 훔친 걸 '유동 자산 회수'라 포장하고, 대표 책상에서 슬쩍한 만년필을 '현물 담보'라 부르다니.

태욱은 헛웃음을 삼키며 안경을 고쳐 썼다.

"포장이 제법 화려하군요, 김자작 씨.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한 행동은 그저 도망치는 와중에 푼돈이나 챙긴 것에 불과합니다. 태산그룹 기획조정실 총괄 서포트팀이 다루는 자산은 믹스커피 몇 포 따위가 아니라 수천억 원대 프로젝트입니다. 그런 거대한 판에서 당신의 그 잡초 같은 잔기술이 통할 것 같습니까?"

태욱의 음성은 다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우리는 엘리트를 원합니다. 위기를 시스템으로 통제할 줄 아는 브레인을 원하지, 길바닥에서 뒹굴며 푼돈 챙기는 생계형 잡초를 원하지 않아요. 밖에서 대기 중인 다른 지원자들의 스펙을 봤습니까? 컬럼비아 MBA, 보스턴 컨설팅 출신들입니다. 그들에 비해 김자작 씨가 가진 강점이 대체 뭡니까?"

압박 면접의 극치였다. 학벌과 스펙을 정면으로 후려치는 잔인한 칼날. 보통이라면 눈물을 뚝뚝 흘릴 상황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존감이 무너져 고개를 숙였겠지만, 김자작의 멘탈은 그런 온실 속 화초들과는 재질부터가 달랐다.

"스펙이요? 당연히 그분들이 저보다 훌륭하죠. 하지만 면접관님!"

자작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태욱이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자작은 비장한 표정으로 제 남색 재킷 양쪽 깃을 꽉 쥐었다.

"그 화려한 엘리트분들이 과연 야반도주한 전무를 잡겠다고 베트남 하노이행 항공권을 뒤져봤겠습니까? 거래처 사장이 소주병을 깨부수며 난동을 부릴 때, 그 파편 사이로 슬라이딩해서 법인카드를 건져 와 봤겠습니까? 아니면 한겨울에 보일러가 터져 얼어붙은 옥탑방에서 찬물로 머리를 감고 칼출근을 해봤겠습니까?!"

자작의 목소리에는 서러움과 악바리 근성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저는 온실 속에서 화초 키우는 법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나는 법은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총괄본부장님께서 아무리 날카롭고 차갑게 몰아붙이셔도, 저는 끄떡없습니다. 전 직장 박 대표는 매일 아침 저한테 쌍욕을 라떼처럼 타줬거든요! 그런 저에게 본부장님의 압박 면접은…… 그냥 시원한 에어컨 바람 수준입니다!"

"시, 시원한 에어컨 바람……?"

태욱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재벌가 후계자이자 완벽주의자인 자신 앞에서 이토록 당당하게 밑바닥 인생을 자랑하며 핏대를 세우는 지원자라니.

그런데 그 순간, 자작이 너무 격정적으로 가슴을 내밀며 열변을 토한 탓이었을까.

투둑- 핑!

경쾌하고도 불길한 소리와 함께, 자작의 재킷을 힘겹게 버티고 있던 가운데 단추가 총알처럼 튕겨 나갔다.

"앗?!"

허공을 가른 단추는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하게 강태욱의 이마 한가운데를 ‘탁!’ 하고 명중한 뒤, 그의 앞에 놓인 커피잔 속으로 퐁당 빠져버렸다.

찰랑-

커피 방울 몇 개가 태욱의 완벽하게 다려진 와이셔츠 깃에 튀었다.

면접실 안이 거짓말처럼 얼어붙었다.

자작의 입이 떡 벌어졌고, 두 손은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단추가 대한민국 재계 1위 태산그룹 후계자의 이마를 저격하고 그의 고급 수제 셔츠에 커피를 튀겼다. 그것도 면접 중에.

‘망했다. 이번엔 진짜로 망했다. 이건 불합격이 아니라 폭행죄로 쇠고랑 찰 판이다.’

자작의 뇌 속에서 수많은 사고 회로가 폭발하며 연기를 뿜어냈다.

태욱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매만졌다. 그리고 붉게 자국이 남은 이마에서 손을 내려, 커피잔에 둥둥 떠 있는 남색 단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분노인지, 당혹감인지, 아니면 생전 처음 겪는 황당함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김자작 지원자."

태욱이 이를 악물며 낮게 읊조렸다.

"지금…… 나를 공격한 겁니까?"

자작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본능적으로 푼수 같은 순발력을 쥐어짜 냈다.

"아, 아닙니다! 그, 그것은…… 제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열정이 너무나 뜨거워 물리적인 폭발을 일으킨 것입니다!"

"열정의…… 폭발?"

"네! 단추조차 제 열정을 가두지 못하고 본부장님을 향해 날아간 것입니다! 본부장님의 심장을 저격하려던 것이 그만 조준 미숙으로 이마를…… 아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작은 허리를 90도로 꺾어 대회의실 바닥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사죄했다.

재킷 앞섬이 벌어져 안에 받쳐 입은 낡은 블라우스가 드러났지만, 지금 수치심 따위를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당장 경호원이 들어와 자신을 질질 끌고 나가지 않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태욱은 멍하니 서 있는 자작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당장 이 여자를 쫓아내고 경비팀을 부르라는 이성의 경고가 울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묘한 호기심과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그를 찾아온 수많은 인재들은 하나같이 태욱의 눈치를 보며 완벽한 정답만을 읊어대는 기계 같았다. 하지만 이 여자, 김자작은 달랐다. 엉망진창이고, 푼수 같고,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태욱은 커피잔에서 젖은 단추를 티슈로 건져 올렸다. 그리고 서류철을 탁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자작 씨."

"네, 넷!"

자작이 벌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태욱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자작의 코앞에 섰다. 압도적인 키 차이와 은은하게 풍기는 고급스러운 우디 향수 냄새에 자작은 숨을 멈췄다.

태욱은 손에 든 젖은 단추를 자작의 벌어진 재킷 주머니에 쏙 집어넣어 주었다. 그의 서늘한 손끝이 자작의 손등을 스치자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그 터질 듯한 열정, 실무에서도 터지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예?"

자작이 눈을 깜빡였다.

태욱은 차가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돌아섰다.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기획조정실 총괄 서포트팀, 3개월 수습입니다. 단, 내일은 단추가 터지지 않는 옷을 입고 오도록. 내 셔츠 세탁비는 첫 달 월급에서 제하겠습니다."

"합…… 합격인 건가요?!"

"나가보세요. 다음 지원자 받아야 하니까."

태욱은 매몰차게 손을 내저었지만, 돌아선 그의 입가에는 아주 희미하고 위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자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면접실 문을 열고 나왔다. 대기실 복도에 발을 들이자마자 다리가 풀려 벽을 짚고 주저앉았다.

‘내가…… 태산에 합격했다고? 단추로 본부장 이마를 까고 합격했다고?’

자작은 주머니 속의 젖은 단추를 꼭 쥐었다. 창피해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가슴속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환희가 솟구쳤다.

봉천동 옥탑방 백수 김자작의 대기업 출근 첫날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야, 김자작! 너 진짜 미쳤어? 태산그룹? 그 대한민국 1위 재벌 태산?!"

서울 신림동 순대타운 3층, 기름 냄새와 소주 냄새가 자욱한 단골 백순대 집 구석자리에서 고막을 찢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작의 대학 동기이자 5년 지기 절친인 수경이 젓가락을 허공에 휘두르며 눈을 부릅떴다. 맞은편에 앉은 또 다른 친구 나래 역시 입에 넣으려던 양배추를 툭 떨어뜨린 채 턱을 떡 벌리고 있었다.

"어…… 어. 나 내일부터 광화문으로 출근해. 기획조정실 총괄 서포트팀."

자작은 앞치마를 목에 두른 채 소주병을 집어 들며 세상에서 가장 거만하고도 푼수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낮에 겪었던 '단추 저격 사건'을 떠올리면 지금도 이불을 발로 뻥뻥 차고 싶을 만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폼을 좀 잡아야 했다.

"어머, 어머! 미쳤나 봐! 너 어제까지만 해도 옥탑방에서 썩은 두부로 찌개 끓여 먹는다고 질질 짜지 않았어?"

"썩은 두부가 아니라 유통기한 사흘 지난 두부였거든? 그리고 사람이 말이야, 큰 물에서 놀 운명이면 어떻게든 길이 열리는 법이야."

자작은 소주를 셋의 잔에 찰랑찰랑 채운 뒤, 잔을 높이 들었다.

"자, 다들 잔 들어! 오늘 밤은 김자작의 화려한 인생 역전과 신데렐라 취업을 기념하는 밤이니까! 백순대 3인분에 곱창 추가, 내가 쏜다!"

"꺅! 김자작 만세! 태산그룹의 별 김자작 만세!"

세 사람의 유리잔이 '깡!'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부딪쳤다.

쓰디쓴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낮에 면접장에서 겪었던 극도의 긴장감과 수치심, 그리고 믿기지 않는 합격의 짜릿함이 한꺼번에 소화되는 기분이었다.

"근데 자작아, 면접 어떻게 본 거야? 너 솔직히 스펙은 우리랑 도긴개긴이잖아. 지방 국립대에 중소 광고대행사 3년 구른 게 다인데, 태산 면접관들이 바보도 아니고 널 왜 뽑았대?"

나래가 순대를 오물거리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자작은 순간 소주를 뿜을 뻔했다. 코앞에서 단추를 쏴서 본부장 이마를 명중시켰다는 말을 차마 맨정신으로 고백할 수는 없었다.

"어…… 그게, 내 '강철 멘탈'과 '압도적인 순발력'에 면접관들이 홀딱 반했달까? 내가 면접실에 들어가자마자 딱 기선제압을 했지. 막 회사의 위기관리 능력이니 뭐니 하면서, 침몰하는 배에서 카누 열 포를 건져낸 나의 결단력을 브리핑했거든."

"카누 열 포? 푸하하! 그걸 면접에서 말했다고?"

수경이 배를 잡고 껄껄 웃었다.

"말했지! 그랬더니 그 악명 높은 총괄본부장이 아주 넋이 나가더라고. 내 열정이 너무 뜨거워서 말이야, 아주 면접실이 후끈후끈했다니까?"

자작은 제 가슴팍을 툭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재킷 안쪽에 꿰매 놓은 짝짝이 단추가 다시 뜯어질까 봐 살살 쳤지만 말이다.

"야, 근데 총괄본부장이면…… 그 사람 아니야? 태산그룹 외아들, 강태욱 본부장!"

나래가 핸드폰을 켜더니 포털 사이트 검색창을 맹렬히 두드렸다.

"맞아! 경제 뉴스에 가끔 나오는 그 사람! 얼굴 완전 배우 뺨치게 잘생겼는데, 성격은 피도 눈물도 없는 칼잡이라는 그 사람 맞지?"

나래가 화면을 들이밀었다.

화면 속에는 고급 수트를 입고 냉랭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강태욱의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과 서늘한 미모가 뿜어져 나왔다.

"헉…… 실물이 사진보다 오만 배는 더 차가워. 눈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 것 같더라니까."

자작은 낮에 그의 코앞에서 맡았던 짙은 우디 향과, 제 손등을 스치던 서늘한 손가락의 감촉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잘생겼잖아! 야, 김자작. 너 진짜 신데렐라 되는 거 아니야? 재벌 3세 총괄본부장과 옥탑방 잡초 여직원의 아찔한 사내 로맨스!"

"미쳤냐? 로맨스는커녕 내일 출근해서 목이나 안 잘리면 다행이다. 내 셔츠 세탁비 첫 달 월급에서 깐다고 벼르고 있단 말이야."

"세탁비? 세탁비는 왜?"

"아, 몰라! 마셔, 마셔! 오늘 밤은 그냥 취하는 거야!"

자작은 말을 돌리며 소주잔을 연거푸 비웠다.

1차 백순대 집에서 소주 네 병을 해치운 세 여자는, 2차로 근처 허름한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탬버린을 양손에 쥔 자작은 테이블 위에 올라가 90년대 댄스곡 메들리를 부르며 온몸을 흔들어댔다.

"내가 바로 태산의 김자작이다! 박상태 대표, 보고 있냐! 네가 버린 돌이 태산의 머릿돌이 되었다!"

마이크를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자작의 모습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면접의 스트레스와 백수의 불안감이 한꺼번에 날아가며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노래방을 나와 비틀거리며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친구들과 헤어지고 혼자가 된 자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출근 첫날이니까 깔끔하게 숙취 해소제 하나 마셔줘야지."

자작은 편의점에서 초록색 병에 든 숙취 해소 음료를 하나 사서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술기운에 달아오른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봉천동 옥탑방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유난히 반짝였다.

저 멀리 광화문 어딘가에 우뚝 솟아 있을 태산그룹 사옥. 내일부터 자신이 그 거대한 성채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이 여전히 꿈만 같았다.

"김자작, 쫄지 마. 넌 잡초야. 밟히면 밟힐수록 더 질기게 살아남는 슈퍼 잡초라고."

자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옥탑방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대충 화장만 지우고, 내일 입고 갈 가장 무난하고 단추가 튼튼한 흰색 셔츠와 슬랙스를 꺼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지만 알람을 아침 6시부터 5분 간격으로 열 개나 맞춰놓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지각하면…… 진짜로 단추로 처형당할지도 몰라."

자작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웅얼거렸다. 강태욱의 서늘한 눈빛과 커피잔에 빠진 남색 단추가 꿈속에 나타날 것만 같았지만, 피로는 알코올보다 무거웠다. 자작은 1초 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삼십 분.

광화문 태산그룹 본사 1층 로비는 출근하는 사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자작은 말끔하게 다려 입은 흰 셔츠에 검정 슬랙스, 그리고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채 로비 한구석에 섰다. 어젯밤의 숙취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속이 살짝 쓰렸지만, 가방 속에 챙겨 온 씹는 은단과 비타민 음료로 무장한 상태였다.

"후…… 침착하자. 오늘은 조용하고 성실한 엘리트로 지내는 거야."

자작은 제 뺨을 가볍게 찰싹 때리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32층 기획조정실 총괄 서포트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가운 도시적 인테리어와 함께 조용한 긴장감이 흘렀다.

사무실 안에는 이미 대여섯 명의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신입…… 아니, 경력직 김자작입니다!"

자작이 90도로 깍듯하게 인사하자,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안경 쓴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총괄 서포트팀 팀장, 한도진이었다.

"아, 김자작 씨? 본부장님 특채로 들어온 분이군요."

한 팀장은 자작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는 저쪽 창가 구석입니다. 우리 팀은 본부장님 직속 보좌 및 그룹 내 긴급 프로젝트 리스크 관리를 전담합니다. 1분 1초가 전쟁터니까 쓸데없는 잡담이나 실수는 용납 안 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팀장님!"

자작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제 자리로 가 앉았다. 최신형 듀얼 모니터와 깔끔한 사무용품이 세팅되어 있었다. 미르 커뮤니케이션의 먼지 쌓인 책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작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사내 메신저를 설치하던 그때, 사무실 문이 스르륵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훅 끼쳐왔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뚝 떨어졌다. 팀원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본부장님, 출근하셨습니까."

강태욱이었다.

다크 네이비 수트에 티 한 점 없는 순백의 와이셔츠, 그리고 완벽하게 매어진 실크 넥타이.

조각 같은 얼굴에 서린 서늘한 기운은 어제 면접장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위압적이었다. 그는 팀원들의 인사에 가볍게 턱짓만 한 번 하고는 총괄본부장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자작의 책상 앞을 지나치는 찰나, 태욱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자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으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본부장님!"

태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자작의 셔츠 앞섶으로 향했다. 자작은 무의식중에 양손으로 가슴을 가릴 뻔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오늘은 단추가 세 겹으로 튼튼하게 박힌 셔츠를 입고 왔으니 튕겨 나갈 일은 없었다.

태욱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단추는 튼튼합니까?"

낮고 서늘한 음성이 사무실을 울렸다.

주변 팀원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 ‘단추? 본부장님이 신입한테 단추 얘기를 왜 해?’ 하는 웅성거림이 눈빛으로 오갔다.

"네! 오늘은 강철 실로 꿰매어 절대 폭발하지 않습니다!"

자작이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외치자, 태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들이켰다.

"본부장실로 커피 들고 들어오세요. 5분 줍니다."

태욱은 차갑게 말을 던지고 본부장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한 팀장이 사색이 되어 자작에게 달려왔다.

"김자작 씨! 본부장님 커피 취향 알아요? 에스프레소 투샷에 물은 정확히 80도, 시럽은 절대 금지예요! 5분 넘기면 바로 지옥문 열리니까 빨리 탕비실로 가요!"

"네? 에스프레소…… 80도요?"

자작은 탕비실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러나 최고급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선 순간, 자작의 뇌 정지가 찾아왔다.

버튼이 수십 개나 달린 독일제 명품 커피 머신이었다. 미르 커뮤니케이션에서 카누 봉지나 뜯어 뜨거운 정수기 물을 붓던 자작에게 이런 하이테크 기계는 우주선 조종석이나 다름없었다.

"어, 어떡하지? 전원 버튼이 어디야? 원두는 어디다 넣어?!"

시계 초침은 무정하게 흘러갔다. 3분, 4분…… 탕비실 밖에서 한 팀장이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맛만 좋으면 되는 거 아냐?!"

자작은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어젯밤 혹시 몰라 가방에 챙겨왔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미르 커뮤니케이션에서 챙겨 온 카누 다크 로스트 스틱 두 포.

자작은 머그잔에 카누 두 포를 탈탈 털어 넣고, 탕비실 정수기 온수 버튼을 눌러 정확하게 물을 맞췄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미친 듯이 휘저어 완벽한 크레마처럼 보이는 거품을 만들어냈다.

"외관은 완벽한 아메리카노야. 냄새도 그럴싸해."

자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머그잔을 들고 본부장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자작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광화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통창 앞에 태욱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본부장님, 주문하신 커피 가져왔습니다."

자작은 조심스럽게 태욱의 넓은 원목 책상 위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태욱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꿀꺽.

그리고 다음 순간, 태욱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가 천천히 가늘어졌다. 그는 커피잔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자작을 쏘아보았다.

"김자작 씨."

"네, 본부장님!"

"내가 요구한 건 과테말라 안티구아 원두를 미디엄 로스팅하여 80도의 온도로 추출한 에스프레소 투샷 아메리카노였습니다."

태욱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낮게 깔렸다.

"그런데 이건…… 지극히 대중적이고, 익숙하며, 쌉싸름한 인스턴트의 맛이 나는군요. 정확히 말하면, 마트에서 100개 묶음으로 파는 카누 다크 로스트의 맛입니다만."

자작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재벌가 후계자의 혓바닥은 카누와 최고급 원두를 0.1초 만에 구별해 내는 절대미각이었던 것이다.

"그…… 그것은……!"

자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한번 목숨을 건 뻔뻔함을 장전했다.

"본부장님의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를 고려한 '맞춤형 도파민 처방'이었습니다!"

"……뭐라고요?"

태욱의 눈썹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고급 원두의 산미는 공복의 위벽을 자극하여 본부장님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카누 다크 로스트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피와 땀이 응축된 서민의 소울 드링크로서, 뇌에 즉각적인 당분과 카페인을 공급하여 위기 대처 능력을 200퍼센트 끌어올려 주는 검증된 포션입니다!"

자작은 가슴에 손을 얹고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눈빛으로 태욱을 바라보았다.

"본부장님의 건강과 태산그룹의 미래를 위해, 제가 특별히 아껴둔 '유동 자산'을 아낌없이 투자한 것입니다!"

본부장실 안에 기괴한 침묵이 흘렀다.

태욱은 멍하니 자작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단추로 이마를 맞추더니, 오늘은 탕비실 커피 머신을 못 다뤄서 카누를 타 오고는 그걸 '맞춤형 도파민 포션'이라 우겨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해고를 통보하고 보안요원을 불러 내쫓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태욱은 이상하게도 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말이나 못 하면."

태욱은 잔을 책상에 탁 내려놓으며 서류철 하나를 자작 앞으로 툭 던졌다.

"알았으니 그 도파민 포션 값이나 하세요. 오늘 오후 세 시까지, 태산유통 신규 브랜드 런칭 기획안 검토해서 리스크 분석 보고서 올려요. 카누처럼 얄팍한 잔머리 굴리면, 그땐 진짜 해고입니다."

"네! 충성을 다해 분석하겠습니다!"

자작은 90도로 배꼽 인사를 올리고 서류철을 품에 꼭 안았다.

뒤돌아 나가는 자작의 등 뒤로, 태욱이 카누를 한 모금 더 홀짝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닫고 나온 자작은 사무실 복도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조용히 환호성을 질렀다.

'살았다! 김자작, 오늘도 살아남았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없었지만, 뻔뻔한 카누 두 포로 버텨낸 첫 출근의 아침이었다. 그리고 닫힌 본부장실 문 너머에서는, 평생 완벽만을 추구해 오던 강태욱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깊게 번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