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차 · 파도
연습실 4번 방
이 글에는 생성형 AI 가 쓴 부분이 있습니다 자세히
편의점 진열대의 삼각김밥 유통기한을 확인하던 손가락 끝이 굳었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던 휴대폰이 멈췄다가,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02’로 시작하는 여덟 자리 번호가 떠 있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수십 번도 넘게 지원서를 넣고, 열 번의 카메라 테스트와 일곱 번의 대면 오디션을 보러 다녔던 곳의 대표 번호였다.
윤채헌은 고무장갑을 벗지도 못한 채 화면을 밀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윤채헌 씨 되십니까. 라우드 엔터테인먼트 신인개발팀입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사무적이었다. 기계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저가 없어서, 채헌은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잊고 바코드 스캐너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네, 맞습니다.”
“지난주에 보신 최종 보컬 오디션 결과 전달드립니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내일 오전 열 시까지 본사 삼층 신인개발팀으로 출석 가능하십니까? 표준계약서 작성 및 연습실 배정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말문이 막혔다. 편의점 냉장 쇼케이스가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밖에서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거친 배기음이 한꺼번에 귓전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 고향인 통영을 떠나 신림동 고시원 단칸방에 짐을 풀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렸던 말이었다.
“……네. 가능합니다. 내일 열 시까지 가겠습니다.”
“신분증과 도장, 통장 사본 지참하셔야 합니다. 지각 시 합격이 취소될 수 있으니 시간 엄수 바랍니다.”
통화는 용건만 남기고 뚝 끊겼다.
채헌은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내고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액정에 뜬 통화 시간은 고작 48초였다. 열아홉부터 스물둘까지, 인생의 사 분의 일을 쏟아부은 결과 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한 마침표였다. 그러나 그 건조함이야말로 이 바닥의 생리라는 것을 채헌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채헌은 앞치마를 벗어 개어두고, 편의점 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한 뒤 대타를 구했다. 새벽 다섯 시에 퇴근해 고시원으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캐리어 속에 처박아 두었던 단정한 셔츠를 다렸다.
다리미의 스팀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눅눅한 방 안 가득 뜨거운 열기가 찼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채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통장에 남은 잔고는 삼십이만 원. 더 이상 부모에게 손을 벌릴 수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노래를 부를 수도 없는 한계점이었다. 라우드 엔터테인먼트는 현재 가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형 기획사 중 하나였고,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가수의 꿈은 영원히 접어야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아홉 시 삼십 분.
청담동 한가운데 우뚝 솟은 라우드 엔터테인먼트의 회색 석조 건물은 멀리서도 위압감을 풍겼다. 채헌은 건물 입구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유리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묵직한 디퓨저 향이 코를 찔렀다.
안내 데스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삼층으로 올라갔다. ‘신인개발본부’라는 현판이 붙은 유리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채헌이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사무실은 전쟁터 같았다. 수십 대의 모니터가 번쩍이고 있었고, 직원들은 저마다 전화를 받거나 서류 뭉치를 든 채 바쁘게 걸어 다녔다. 벽면 한쪽에는 현재 활동 중인 소속 아이돌과 솔로 가수들의 앨범 포스터, 그리고 그 옆으로 빼곡하게 적힌 월말 평가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윤채헌 씨?”
날카로운 목소리에 채헌은 고개를 돌렸다. 단발머리에 각진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서류철을 든 채 채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명찰에는 ‘신인개발팀 수석팀장 박선우’라고 적혀 있었다.
“네. 윤채헌입니다.”
“따라와요.”
박선우 팀장은 군더더기 없이 돌아섰다. 복도 끝에 위치한 작은 회의실로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 계약서 세 묶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앉아요.”
박 팀장은 맞은편에 앉아 안경을 고쳐 썼다.
“채헌 씨가 이번에 계약하는 형태는 A급 연습생 계약이에요. 숙소는 제공되지 않지만, 회사 내 모든 트레이닝 비용과 연습실 사용료는 전액 회사가 부담합니다. 대신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진행되는 정기 월말평가에서 두 번 연속 하위 10퍼센트에 들면 계약은 즉시 해지됩니다.”
박 팀장의 손가락이 계약서의 특정 조항을 짚었다.
“우리는 학교가 아니에요. 실력이 늘지 않는 연습생을 데리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노래를 잘해서 뽑았지만, 여기 들어온 이상 채헌 씨가 잘하는 건 기본값이에요. 남들보다 뭘 더 보여줄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채헌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 마지막 장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었다. 잉크의 붉은 자국이 종이에 번지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진짜 시작이었다.
“좋아요. 서류는 이걸로 끝났고. 출입 카드 발급받았죠? 이제 연습실로 내려갈 겁니다.”
박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헌도 뒤따라 일어섰다. 엘리베이터는 1층을 지나 지하로 내려갔다. 버튼에는 지하 1층 ‘댄스 스튜디오’, 지하 2층 ‘보컬 및 개인 연습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하 1층은 데뷔조와 일반 연습생 공용 댄스홀이에요.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하고 무단 사용은 금지입니다. 채헌 씨가 주로 머물 곳은 지하 2층이에요.”
‘띵’ 하는 맑은 알림음과 함께 지하 2층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쿵쿵거리는 베이스 음향과 불규칙한 피아노 선율, 벽진 방음벽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들이 뒤섞여 귓가를 때렸다. 복도는 길고 어두웠으며, 양옆으로 두꺼운 방음문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었다. 문마다 번호가 적힌 아크릴 표찰이 붙어 있었다.
지나가는 연습생 몇 명이 박 팀장을 보고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시선이 박 팀장의 뒤를 따르는 채헌에게 닿았다. 낯선 얼굴을 향한 경계와 탐색이 뒤섞인 서늘한 눈빛이었다.
채헌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걸었다. 이미 여러 기획사의 오디션장을 전전하며 익숙해진 눈빛들이었다. 이곳에서 다정함을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보컬 연습실은 총 여섯 개가 있어요. 1번부터 3번까지는 데뷔 조 전용이고, 5번과 6번은 공용이라 예약제로 운영됩니다.”
박 팀장이 복도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채헌의 눈앞에 ‘4’라는 숫자가 적힌 회색 철문이 나타났다. 다른 문들과 달리 문고리 주변에 테이프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문틈 사이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채헌 씨는 이 4번 방을 쓰게 될 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혼자 쓰는 건가요?”
채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 신입 연습생에게 개인 연습실이 온전히 배정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뜻밖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 팀장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럴 리가요.”
박 팀장이 손잡이를 잡고 문을 거칠게 밀어 열었다.
무거운 방음문이 덜컥거리며 열리자, 좁은 방 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략 서너 평 남짓한 공간. 한쪽 벽면에는 전신 거울이 붙어 있었고, 구석에는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와 작은 건반 오디오 인터페이스, 보면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바닥에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검은색 후드 티셔츠의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는 귀에 헤드폰을 낀 채 손에 든 스프링 노트를 펜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요란한 소리에도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바닥에는 구겨진 악보 찌꺼기들과 마시다 만 생수병 서너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차이선.”
박 팀장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제야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게 눌러쓴 모자 챙 아래로 날렵한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이 드러났다. 헤드폰을 한쪽 귀 뒤로 밀어 넘긴 남자의 눈매는 서늘하다 못해 피로에 절어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박 팀장을 지나, 그 뒤에 서 있는 채헌에게 멎었다. 채헌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췄다. 상대의 눈빛은 마치 남의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을 보는 것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팀장님. 나 방해받는 거 싫다고 몇 번을 말해요.”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긁히는 저음이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메말라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명백한 불쾌감은 숨겨지지 않았다.
“회사 방침이야, 이선아. 네가 두 달째 월말평가 곡 제출도 안 하고 데뷔조 합류도 거부하고 있으니까. 이 방, 이제 너 혼자 쓰는 전용실 아니야.”
박 팀장은 익숙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채헌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윤채헌. 오늘 들어온 신입 보컬이다. 앞으로 이 방, 둘이 같이 써.”
“……네?”
채헌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반문이 튀어나왔다.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던 차이선이라는 남자가 헛웃음을 쳤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키 때문에 좁은 연습실이 순식간에 꽉 차는 듯한 위압감이 들었다.
“팀장님, 장난해요? 나 지금 작업 중인 거 안 보여요?”
“안 보여. 그리고 네가 작업을 하든 말든, 4번 방 배정은 개발본부장님 컨펌 끝난 사안이야. 채헌 씨, 짐 풀고 시간표대로 보컬 기초 레슨부터 시작해요. 시간 배분은 알아서 둘이 맞추고.”
박 팀장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뒤돌아 문을 닫아버렸다.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방음문이 닫히자, 사방이 완벽한 침묵 속에 갇혔다.
좁은 방 안에는 낯선 공기만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바닥에 흩어진 종이 쪼가리들 사이로, 채헌과 이선 사이에 메마른 정적이 흘렀다.
이선은 들고 있던 펜을 피아노 건반 뚜껑 위에 툭 던졌다. 맑은 건반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튀어 올랐다.
“야, 신입.”
이선이 모자를 벗어 던졌다.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피곤에 지쳐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불꽃처럼 형형했다.
“너 몇 살이야.”
채헌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가방끈을 꽉 쥐었다. 기선 제압에 밀리면 이 좁은 방에서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스물둘입니다.”
“나보다 한 살 많네.”
이선이 턱을 까딱이며 방 구석을 가리켰다.
“누나든 형이든 상관없는데, 규칙은 정하자고. 난 여기서 곡 써야 돼. 그러니까 여기서 소리 지르거나 목 풀 생각 하지 마.”
채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긴 보컬 연습실인데요.”
“알아. 근데 내가 먼저 쓰고 있었어.”
이선은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헤드폰을 귀에 걸치며 채헌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덧붙였다.
“노래하고 싶으면 저기 5번 공용실 가서 줄 서서 예약해. 여긴 내 작업실이니까 건드리지 말고.”
채헌의 심장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았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첫날부터 방을 비우라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채헌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피아노 옆에 놓인 작은 간이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앉았다.
“방금 팀장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둘이 같이 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