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 샤인
피 묻은 가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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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풍루의 사립문을 밀고 나오자 산바람이 삿갓 끝을 때렸다.
노을은 이미 잦아들었다. 잿빛 어둠이 고갯마루에 내려앉고 있었다. 흙먼지 섞인 바람에 희미한 비린내가 묻어 있었다.
진무결은 주막 뒤편으로 걸었다. 인적이 끊긴 벼랑 끝 바위턱이었다. 발아래로 천 길 낭떠러지가 검푸르게 웅크렸다. 저 멀리 화북의 메마른 대지가 뻗어 나갔다. 그 어딘가에 십 년 전 핏물로 지워진 철검문의 옛 터가 묻혀 있었다.
무결은 등 뒤로 손을 넘겨 검병을 쓸었다. 삼베 천 너머로 쇠붙이의 찬 기운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검을 쥐면 언제나 그날 밤의 냄새가 났다. 살점 타는 연기와 선혈.
'사부님.'
십 년 전 그 가을밤은 달이 밝았다.
철검문은 큰 문파가 아니었다. 산자락 깊숙이 자리 잡고 실전 검술만 갈았다. 문주 철선검 배도현은 제자들에게 검의 도리와 무게를 가르쳤다. 엄격했고, 인자했다.
그날 밤도 무결은 연무장에 홀로 남아 있었다. 묵야검결의 초식을 펼칠 때마다 청강고검이 낮게 울었다.
그런데 풀벌레 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콰아앙!
박달나무 대문이 산산조각 나며 날아갔다. 당번 제자들의 피가 흙바닥에 튀었다. 어둠에서 쏟아진 그림자들은 흑의를 걸치고 얼굴을 가렸다. 수십 명이었다. 흩어지는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기습이다! 모두 검을 잡아라!"
사형들의 고함은 곧 단말마로 바뀌었다. 불화살이 누각을 뒤덮었다. 반 각도 되지 않아 철검문은 생지옥이 되었다.
무결은 청강고검을 뽑아 들고 본당으로 내달렸다. 어린 사제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무결의 검이 흑의인 둘의 목줄기를 갈랐다. 그래도 적의 수는 줄지 않았다.
도적 무리가 아니었다. 진형이 군세처럼 절도 있었고, 살인 무공이 정교했다. 명문 정파도 사파의 거두도 함부로 부릴 수 없는 살수들이었다.
"사부님! 사형!"
본당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을 때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다.
장로들은 주검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중앙에 배도현만이 검을 짚고 서 있었다. 발치에 시체 십여 구가 쌓였고, 그의 가슴과 단전에는 검 세 자루가 박혀 있었다.
맞선 셋은 흑의가 아니었다. 고급 비단 도포를 입고 희고 찬 가면을 얹고 있었다. 중앙에 선 자의 기도만으로 본당의 공기가 짓눌렸다.
"철검문주. 오래전의 약조가 적힌 문서는 어디 두었는가. 명맥을 부지하고 싶다면 내놓아라."
가면 너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오만했다.
배도현이 피를 한 움큼 토하고 웃었다.
"군자의 탈을 쓰고…… 협을 논하던 놈들이. 기껏 탐하는 것이…… 이런 더러운 야욕이었더냐."
"불태워라. 먼지 하나 남기지 마라."
양옆의 고수들이 검을 뽑았다.
그 순간 무결이 몸을 날렸다.
"네놈들!"
청강고검이 푸른 검강을 뿜었다. 분노로 가득 찬 검로였다.
가면의 고수가 소매를 한 번 저었다. 검로가 산산이 부서졌다.
쿠웅!
내력의 파동이 흉곽을 후려쳤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결의 몸이 기둥을 들이받았다. 입안에 핏물이 고였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경지였다.
"철검문의 핏줄이 하나 더 남았군. 깔끔하게 끊어주마."
사내의 손끝에서 살기가 벼려졌다.
"무결아!"
배도현이 제 몸에 박힌 검 하나를 맨손으로 뽑아 던졌다. 피분수가 솟구쳤다. 그는 일생의 진기를 전부 끌어올렸다.
철검문의 금지된 결사 무공, 천추혈검.
콰르릉!
붉은 검막이 본당을 뒤흔들며 가면의 고수들을 덮쳤다. 그들이 물러서는 사이, 배도현의 손이 쓰러진 무결의 덜미를 낚아챘다.
비밀 통로를 빠져나와 뒷산 벼랑에 닿았을 때, 배도현의 숨은 턱밑까지 차 있었다. 달빛 아래 얼굴이 잿빛이었다. 입과 코와 귀에서 검붉은 피가 흘렀다.
"사부님! 정신 차리십시오! 제발……!"
무결이 혈도를 짚으려 했다. 그러나 혈맥은 이미 전부 끊겨 있었다.
배도현이 피 묻은 손으로 제자의 뺨을 쓸었다.
"울지 마라…… 무인은 피를 흘릴지언정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제가…… 힘이 없어서…… 사형들도, 문파도……!"
"네 탓이 아니다.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위선자들이…… 제 치부를 가리려 저지른 짓이다. 살아라. 살아남아야 한다."
배도현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쥐여주었다. 피로 얼룩진 낡은 가죽 비급과 청강고검이었다. 묵야검결의 온전한 비결이었다.
"살아서…… 검의 본질을 잊지 마라. 묵야의 어둠 속에서 칼을 갈아라. 세상이 거짓으로 뒤덮여도…… 우직하게 벼려낸 검만이 위선을 벤다. 철검문의 맥을…… 끊지 마라……!"
멀리서 횃불 수십 개가 벼랑을 향해 좁혀 왔다.
배도현이 마지막으로 웃었다.
"가라."
그러고는 남은 힘으로 제자의 등을 벼랑 아래로 밀쳤다.
"사부니임!"
곤두박질치는 시야 속에, 홀로 칼을 짚고 일어서서 횃불을 가로막는 사부의 뒷모습이 박혔다.
그것이 무결이 본 철검문의 마지막이었다.
계곡의 얼음장 같은 급류가 그를 떠내려 보냈다.
갈비뼈는 으스러졌다. 내상은 깊었고 왼팔은 부러져 덜렁거렸다. 그래도 육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결은 피를 토하며 기어갔다. 북방의 험준한 설산, 인적이 닿지 않는 동굴로 숨어들었다.
칼바람이 부러진 뼈마디를 파고들었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었다. 입구에 쌓인 눈을 긁어 입술을 적셨다. 쓴 나무뿌리를 씹어 허기를 달랬다. 상처의 염증이 온몸을 불덩이로 만들었다. 의식이 아득해질 때마다 제 입술을 물어뜯어 피 맛으로 정신을 붙들었다.
'살아야 한다.'
혼몽한 어둠 속에서 그는 품속의 비급을 더듬었다. 가죽 책장에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 위의 구결이 사부의 절규처럼 보였다.
무결은 차가운 바닥에 가부좌를 틀었다.
기경팔맥은 뒤엉켜 있었다. 단전의 진기는 흩어져 불씨조차 희미했다. 호흡을 고를 때마다 가슴이 찢기는 격통과 함께 피거품이 치솟았다.
으스러진 갈비뼈가 숨마다 살점을 찔렀다. 부러진 왼팔은 감각이 사라진 채 시커멓게 부어 있었다. 진물과 피가 도포 조각에 엉겨 얼음 딱지가 되었다.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잠들면 끝이다.'
무결은 떨리는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동상으로 마비되어 있었다. 그래도 바위를 긁어 상체를 일으켰다.
먼저 팔이었다. 뼈가 어긋난 채 굳으면 다시는 검을 쥘 수 없다.
무결은 마른 나뭇가지 두 토막을 주웠다. 이를 악물고 부러진 뼈마디를 더듬었다. 덜렁거리는 뼈를 억지로 맞추는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으…… 윽!"
신음이 새지 않도록 입술을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가 목구멍을 넘어갔다. 찢긴 옷소매로 나뭇가지를 덧대어 뼈를 고정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땀방울은 살갗에 닿자마자 얼음 알갱이가 되어 떨어졌다.
치명적인 것은 허기와 갈증이었다.
무결은 기어가 동굴 입구의 굳은 눈을 긁어모았다. 얼음 파편이 혓바닥을 베었다. 피 맛 섞인 눈물을 삼켜 목을 축였다.
눈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피투성이 손가락으로 얼어붙은 흙을 파헤쳤다. 손톱이 뒤집히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흙 속의 메마른 칡뿌리와 바위의 돌이끼를 닥치는 대로 뜯어 씹었다. 모래알처럼 거칠었으나 한 조각도 뱉지 않았다.
바위틈에 얼어 죽은 산새나 쥐가 손에 잡히기도 했다. 털가죽도 못 벗긴 채 뼈째 씹어 삼켰다. 위장이 뒤집혔다. 무결은 제 배를 주먹으로 내려쳐 게워내려는 것을 틀어막았다.
살아야 했다.
아직 갚아야 할 피의 빚이 있었다. 군자의 탈을 쓴 위선자들의 목을 베기 전까지는 황천길조차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름쯤 지나 염증이 가라앉고 뼈가 어설프게 자리를 잡았다.
눈보라가 잦아든 어느 밤, 무결은 품속에서 가죽 비급을 꺼냈다.
묵야검결. 사부 배도현이 마지막 숨으로 건넨 철검문의 정수였다.
표지는 검붉은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책장을 넘기자 묵향 대신 쇠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천장 틈새로 스며드는 달빛에 의지해 첫 장을 넘겼다.
전반부는 그가 사문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기본 심법과 보법, 묵야검결의 초식. 어둠 속에서 호흡을 숨기고 허점을 파고드는 실전 검술이었다.
중반을 넘기자 무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부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극의의 구결이었다. 적힌 글귀가 그가 아는 내가기공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었다.
'기운을 단전에 모으되 머물게 하지 말고, 숨을 들이쉬되 폐부를 비워 어둠으로 채워라……?'
읽을수록 머릿속이 안갯속처럼 아득해졌다.
'검은 빛을 쫓지 않고 칠흑 그 자체가 되나니, 흐르는 숨결이 끊어지는 찰나에 참된 칼날이 선다. 삭풍이 살을 벨 때 살을 잊고, 뼈가 부서질 때 뼈를 지워라. 천지가 암흑에 잠겼을 때 비로소 검은 눈을 뜬다.'
무림의 심법은 단전에 진기를 쌓고 기경팔맥으로 순환시키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이 구결은 숨결을 끊어 기운을 흩뜨리라 했다. 텅 빈 곳에 스스로를 던져 넣으라 했다. 어둠에 동화된다는 것이 어떤 경지인지, 청년의 얕은 무학으로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어둠을 가르려 하지 마라…… 어둠 속에 흩어져 그림자조차 남기지 마라……."
무결은 무작정 가부좌를 틀었다.
내상을 억누른 채 기경팔맥을 거꾸로 운행하려 했다. 숨을 멈추고 심장의 박동을 눌렀다. 기운을 바깥으로 흩뿌리려 했다.
찰나, 단전의 기운이 통제를 벗어났다.
콰르릉!
혈맥이 뒤틀렸다. 비틀린 진기가 가슴팍을 난타했다.
"커헉!"
검붉은 핏덩이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전신의 혈관이 부풀었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고 두통이 뇌리를 강타했다. 주화입마의 전조였다. 무결은 가부좌를 풀고 바닥을 뒹굴며 단전의 맥을 끊어 폭주를 눌렀다.
엎드린 턱 끝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혼자 힘으로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승의 지도 없이 구결을 흉내 내는 짓은 자살행위였다.
사부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무결아, 검결의 글귀에 매달리지 마라. 무공이란 종이 위의 먹물이 아니라 네 살과 뼈를 깎아 만드는 길이다. 때가 되지 않아 보이지 않는 것은 억지로 눈을 부라려도 보이지 않는 법이니라."
그때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무결은 비급을 품속 깊이 갈무리했다.
'지금의 내 그릇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
벽을 마주했으면 돌아가야 했다. 기초가 부실하면 바닥부터 다져야 했다.
그의 시선이 삼베 천에 싸인 청강고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