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차 · 해피
20년 전 그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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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겨울비가 살갗을 파고들던 그날, 윤은채는 스무 해 동안 자신의 모든 피와 땀을 갈아 넣었던 식당 ‘성진옥’의 후문 계단에서 내쳐졌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굳은살과 화상 흉터로 뭉툭했고, 손목은 쉼 없이 뚝배기와 무쇠솥을 나르느라 닳을 대로 닳아 있었다. 하루 열여섯 시간씩 불 앞에 서서 육수를 끓이고 천연 소스를 연구하느라 은채의 젊음은 잿빛으로 바스러진 지 오래였다. 그 대가로 전국에 쉰 개가 넘는 가맹점을 거느린 대형 브랜드로 성장한 성진옥이었으나, 정작 법인 등기부등본 어디에도 윤은채라는 석 자는 없었다.

"주제 파악을 해야지. 네가 주방에서 국 자루나 젓던 것 말고 이 집에 무슨 공을 세웠다고 지분을 내놓으라 마라야?"
시어머니 홍명숙은 모비로드 코트 깃을 여미며 계단 위에서 은채를 내려다보았다. 옥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이혼 합의서를 은채의 얼굴에 내던졌다.
"도진이가 밖에서 낳아 온 아이는 우리 배씨 집안의 대를 이을 귀한 핏줄이다. 애도 못 낳는 몸으로 여태껏 성진옥 안주인 행세를 했으면 은혜를 알아야지. 위자료랍시고 몇 푼 챙겨주려 했더니 건방지게 대표이사 명의를 논해?"
은채는 바닥에 흩어진 종이 쪼가리를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입술을 깨물며 곁에 선 남편 배도진을 올려다보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은채의 돈으로 세워준 명품 시계를 찬 그 남자는 은채의 시선을 비겁하게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도진 씨……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 성진옥 첫 매장 보증금, 내 전세금 털어서 넣은 거였잖아. 비법 간장이며 육수 배합비, 다 내가 잠 못 자고 만든 내 피땀이잖아!"
"은채야, 좋게좋게 끝내자. 어머니 말씀이 아주 틀린 건 아니잖아. 어차피 넌 사업자등록증 낼 줄도 몰랐고, 행정이며 경영은 우리 어머니랑 내가 다 도맡아 했어. 넌…… 그냥 요리만 한 거잖아."
도진의 목소리는 기름기 흐르듯 미끄러웠다. 죄책감 따위는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은, 철저한 타인의 목소리였다.
"내가 요리만 했다고……? 당신들이 프랜차이즈 박람회에 나가서 자랑하던 그 모든 맛이 누구 손에서 나온 건데!"
"닥치거라! 어차피 레시피 배합표는 연구소 공장으로 다 넘겼고, 상표권도 우리 도진이 이름으로 등록한 지 십 년이 넘었다. 법적으로 넌 그저 월급 따박따박 받아 간 찬모에 불과해!"
홍명숙의 매몰찬 고함과 함께 건장한 사내 둘이 은채의 양팔을 거칠게 낚아채 골목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빗물 웅덩이에 처박힌 은채의 낡은 가방이 터져 나가며, 이십 대 시절부터 펜이 닳도록 써 내려갔던 조리 연구 일지의 낱장들이 흙탕물에 젖어 들어갔다.
명치 끝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피를 토해내며 은채는 비명을 질렀다. 자궁을 들어내고, 관절이 망가지고, 폐에 기름 연기가 가득 찰 때까지 일만 했던 지난 이십 년. 가족이라는 이름의 족쇄에 묶여 착취당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시……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피 묻은 손으로 흙탕물을 움켜쥐며 헐떡이던 은채의 시야가 새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 끝에 찾아온 것은 지독한 적막이었다.
"……헉!"
은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차가운 빗물도, 비릿한 피 냄새도 없었다. 코끝을 스치는 것은 익숙한 옥탑방 특유의 볕 냄새와 오래된 장판 냄새였다.

은채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기형적으로 굵어졌던 손가락 관절이 매끄러웠다. 뜨거운 기름이 튀어 흉측하게 남았던 화상 자국도 없이, 희고 단단한 스물다섯의 피부가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은채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낡은 전신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퀭하게 곯아 있던 마흔다섯의 폐인이 아닌, 맑고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한 스물다섯의 자신이 서 있었다. 뺨에 맴도는 붉은 기운, 맑게 트인 눈동자, 굽지 않은 반듯한 어깨.
달력을 보았다.
**2005년 10월 14일.**
탁상달력의 오늘 날짜 위에는 붉은색 색연필로 커다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 옆에 적힌 단정한 글씨.
[도진 씨 어머니와 오찬 및 종로 매장 임대차 계약 미팅.]
은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물다섯. 바로 그날이구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배도진과 만난 지 1년 남짓 되던 날. 시어머니 홍명숙은 "가족이 될 사이인데 네 돈 내 돈이 어디 있느냐"라며 은채를 살살 구슬렸다. 은채가 악착같이 모은 전세 보증금과 적금 5천만 원을 종로 골목의 낡은 식당 자리 권리금으로 밀어 넣게 만들고, 그 가게를 훗날의 '성진옥' 1호점으로 둔갑시킨 바로 그 시점이었다.
심지어 계약서 명의는 "남자가 바깥일을 해야 기가 산다"는 명목으로 배도진의 이름으로 올리게 했고, 은채가 몇 년간 밤잠을 줄여 개발했던 천연 육수 숙성 비법 일지도 홍명숙의 손에 넘어가 '가문의 비전'으로 둔갑했다.
그것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인 줄도 모르고, 당시의 은채는 시어머니의 칭찬 한마디에 바보처럼 웃으며 제 모든 것을 바쳤었다.
은채는 방 한구석에 놓인 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랍을 열자 가죽이 덧대어진 두툼한 바인더, 은채의 영혼이나 다름없는 '조리 연구 일지'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계절별 식재료의 수분 함량, 발효 효모의 온도별 숙성 속도, 천연 조미 소스의 추출 배합비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노트였다.
은채는 일지를 가슴에 꽉 품어 안았다. 눈물이 왈칵 솟구쳤으나, 이내 이를 악물며 눈물을 도로 삼켰다.
'이번엔 절대로 안 빼앗겨.'
은채의 눈빛이 형형하게 가라앉았다. 지난 생의 20년은 피눈물 나는 착취의 역사였지만, 동시에 그 세월 동안 은채가 체득한 조리 기술과 시장을 보는 감각, 프랜차이즈 사업의 구조적 맹점은 고스란히 은채의 머릿속에 축적되어 있었다.
2005년은 대한민국 외식 산업이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화와 브랜드화를 시작하던 과도기였다. 사람들은 아직 레시피의 지식재산권이나 특허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고, 구두계약과 인맥으로 장사를 시작하던 주먹구구식 시대였다.
하지만 은채는 알고 있었다. 이 조리 연구 일지에 적힌 발효 소스와 육수 추출 기법이 얼마나 엄청난 가치를 지닌 '기술'인지를.
은채는 일지를 안전하게 가방에 넣고, 서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인감도장과 은행 통장을 꺼냈다.
통장 잔고 5,200만 원.
스무 살부터 식당 주방 보조, 출장 요리, 반찬 가게를 전전하며 피땀 흘려 모은 순수한 자신의 노동 대가였다.
'이 돈은 내 사업의 밑천이야. 배도진의 체면을 세워줄 쌈짓돈이 아니라.'
은채는 옷장을 열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예비 시어머니에게 얌전하고 순종적으로 보이기 위해 골랐을 헐렁한 파스텔톤 원피스를 밀어냈다. 대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짙은 감색 정장 재킷과 슬랙스를 꺼내 입었다. 머리는 잔머리 하나 없이 단정하게 뒤로 묶어 올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착하고 순진해서 이용해 먹기 딱 좋은 '예비 며느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권리를 단 한 됫박도 남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냉철한 직업인의 얼굴이었다.
약속 장소는 종로 3가 뒤편에 자리한 고급 한정식집 '청파루'였다.
홍명숙은 이런 자리를 잡을 때조차 제 주머니에서는 단 천 원도 쓰지 않았다. "은채야, 네가 장차 우리 집안에 들어와 큰일을 하려면 이런 귀한 자리 계산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로 은채에게 밥값을 떠넘기곤 했다.
은채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서 새어 나오던 두 사람의 대화가 딱 멈췄다.
"어머니, 이번에 은채 돈 받아서 종로 자리 계약하고 나면 차부터 한 대 뽑을게요. 친구들은 다 그랜저 끌고 다니는데 나만 낡은 아반떼 타고 다니니까 영 모양이 빠져서요."
"그래, 내 새끼. 남자는 차가 명함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은채 걔는 워낙 손이 야무지고 고분고분하니까, 식당 주방에 묶어두고 일만 시키면 돈은 금방 불어난다. 넌 바깥에서 사장 소리 들으면서 인맥이나 넓히거라."
"은채가 자기 명의로 점포 올리자고 떼쓰면 어쩌죠?"
"떼를 쓰긴 왜 써? 시어머니 될 사람이 집안의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엄하게 한마디 하면 찍소리도 못할 아이다. 걔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서 어른 대접해 주는 거라면 껌뻑 죽는 거 몰라?"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은채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일찍들 오셨네요."
방 안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배도진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고, 홍명숙은 당황한 기색을 얼른 감추며 특유의 인자한 척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 은채 왔니? 어서 앉거라. 무슨 옷을 그렇게 딱딱하게 입고 왔누? 여자는 자고로 화사하게 입어야 복이 들어오는 법인데."
홍명숙의 눈길이 은채의 각 잡힌 정장 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평소처럼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해요, 어머니"라고 할 줄 알았던 은채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맞은편 상석에 단정하게 앉았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왔습니다만, 어머님과 도진 씨가 먼저 와 계셨네요."
은채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방 안을 울리는 어조는 팽팽하게 날이 서 있었다. 도진이 슬그머니 은채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건넸다.
"은채야, 통장이랑 도장은 잘 챙겨왔지? 오늘 점심 먹고 바로 종로 쪽 부동산 가서 계약서 쓰기로 했잖아. 권리금 4천에 보증금 1천, 딱 맞게 떨어졌어."
도진은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치며 은채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은채는 찻잔을 들어 올리는 척하며 도진의 손을 자연스럽게 쳐냈다. 도진의 손이 허공에서 머쓱하게 멈췄다.
"도진 씨, 그 계약 말인데요."
은채는 따뜻한 옥수수염차를 한 모금 머금은 뒤, 찻잔을 탁자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제가 제 돈 5천만 원을 투자해서 그 자리를 계약하는데, 어째서 임차인 명의가 배도진 씨로 들어가는 거죠?"
홍명숙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은채야, 그건 아까도 다 설명하지 않았느냐. 장차 한식구를 이룰 사이인데 명의가 누구면 어때? 도진이가 집안의 가장이고, 남자가 대외적으로 사장 감투를 쓰고 있어야 관공서 일이든 거래처 납품이든 무시를 안 당하는 법이다. 넌 주방에서 맛있는 음식 만드는 데만 집중하면 돼. 그게 다 널 편하게 해주려는 이 어미의 깊은 뜻이란다."
과거의 은채는 이 '너를 위한 배려'라는 악마의 속삭임에 속아 넘어갔었다.
책임은 전적으로 도진이 질 테니 너는 편하게 요리나 하라는 말. 하지만 20년 뒤 마주한 진실은 무엇이었던가?
수십억의 빚과 가맹점 분쟁이 터졌을 때는 은채를 방패막이로 내세웠고, 돈이 벌리고 명예가 쌓였을 때는 "너는 명의도 없는 일개 찬모"라며 내팽개쳤던 자들이었다.
은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 노골적으로 섞인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