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 해피
파혼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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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숙의 얼굴에서 인자한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눈꼬리가 잘게 파르르 떨리더니, 쥐고 있던 물수건을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은채 너, 방금 그 웃음은 무슨 뜻이냐? 어른이 집안의 앞날을 생각해서 깊은 뜻으로 타이르는데, 비웃는 게야?"
홍명숙의 음성에 억눌린 권위가 묻어났다. 평소의 은채라면 어깨를 움츠리며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하고 고개를 숙였을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은채는 꼿꼿하게 세운 허리를 굽히지 않은 채, 홍명숙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비웃은 게 맞습니다."
"뭐, 뭐라고?"
"어머님 말씀이 하도 우습고 얼토당토않아서요."
은채의 음성은 물결 하나 일지 않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배도진이 기겁하며 은채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은채야! 너 오늘 왜 이래? 어머니한테 말버릇이 그게 무슨……!"
"손 치워요."
은채가 서늘하게 쏘아붙이자, 도진은 델 뻔한 사람처럼 손을 홱 뗐다. 은채의 눈빛에 서린 기운이 예전의 순종적이던 약혼녀의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겪고 칼을 품은 자의 날카로운 서늘함이 그 맑은 눈동자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은채는 핸드백에서 자신이 챙겨온 서류철과 낡은 가죽 장정의 조리 연구 일지를 꺼내 탁자 위에 단정하게 올려놓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투자한 사람이 권리를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입니다. 종로 3가 매장의 보증금 1천만 원, 권리금 4천만 원. 합쳐서 5천만 원이죠. 그 돈 전액이 제 통장에서 나갑니다. 그런데 왜 임차인 명의는 배도진 씨가 되고, 사업자등록증 대표자도 배도진 씨가 되어야 합니까?"
"야, 윤은채. 내가 밖에서 일을 봐야……."
"도진 씨가 무슨 일을 보는데요?"
은채가 도진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식당 입지 분석을 도진 씨가 했습니까? 그 자리가 주변 공구 상가와 귀금속 도매상들의 동선을 끼고 있어 점심 회전율이 높다는 계산, 제가 3개월 동안 새벽마다 나와서 유동 인구 세어가며 뽑아낸 결과입니다. 주방 설비 견적은요? 닥트 공사 업체 비교는 도진 씨가 하셨나요? 다 제가 발품 팔아 알아봤습니다."
도진의 낯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실제로 그가 한 일이라고는 친구들에게 "나 이제 종로에 대형 식당 사장 된다"며 술을 얻어마시고 다닌 것뿐이었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음식."
은채는 탁자 위의 '조리 연구 일지' 표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천연 재료로 단맛을 내고 고기 잡내를 잡는 육수 배합비, 계절별 숙성 기간을 맞춘 장류 레시피. 제가 지난 5년간 요리학원과 한정식집 주방 보조를 전전하며 밤잠 줄여 연구한 제 지적 자산입니다. 도진 씨는 된장찌개 하나 제 손으로 끓일 줄 압니까?"
"은채야, 넌 말을 꼭 그렇게 섭섭하게 해야겠어? 우리가 남이야? 장차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룰 부부잖아!"
도진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남자가 밖에서 기가 살아야 돈도 더 잘 벌어오는 법이야. 네가 뒤에서 묵묵히 받쳐주면, 내가 사장실에서 거래처 만나고 관공서 위생과 상대하면서 가게를 더 크게 키울 수 있잖아. 어머니 말씀대로 그게 널 아끼고 편하게 해주는 길이라니까?"
"편하게 해주는 길?"
은채의 입가에 맺힌 비소가 더 짙어졌다.
지난 생의 기억이 벼락처럼 뇌리를 스쳤다. 관공서 위생 점검이 나오면 도진은 도망치듯 골목 피시방으로 숨었고, 은채가 기름때 묻은 앞치마를 입은 채 공무원들을 상대하며 고개를 숙였다.
거래처 수금 결제가 밀리면 도진은 어머니 치맛자락 뒤로 숨어 은채에게 사정을 떠넘겼다. 그렇게 뼈가 닳도록 일해 번 돈은 전부 홍명숙의 주머니와 도진의 외제차 리스비로 들어갔다.
"명의가 배도진 씨로 들어가는 순간, 이 5천만 원은 법적으로 제가 도진 씨에게 무이자로 증여한 꼴이 됩니다. 임대차보호법상 보증금 반환 청구권도 도진 씨에게 귀속되고, 세무서상 모든 영업권과 권리금 회수 기회도 도진 씨의 것이 되죠. 만에 하나 사업이 잘되든 안 되든, 저는 법적으로 아무런 지분도 주장할 수 없는 무임금 찬모로 전락하는 겁니다."
은채의 또박또박한 법률적·경제적 지적에 홍명숙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홍명숙은 은채가 어디서 이런 해괴한 소리를 배워왔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순진하게 구슬리면 통장째로 넘겨줄 줄 알았던 고분고분한 아이가, 마치 노련한 법률가처럼 계약의 맹점을 송곳처럼 찔러대고 있었다.
"너…… 너 지금 무슨 흉악한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증여? 지분? 찬모?"
홍명숙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 며느리 고생 덜 시키려고 배려를 해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감히 돈 계산기를 두드려? 그래, 네 돈 5천만 원 들어가는 거 대단하다, 대단해! 하지만 우리 도진이의 인물과 앞날, 우리 집안의 간판은 돈으로 환산이 안 되는 가치야! 네가 부모 없이 자라 근본이 없어서 집안의 법도를 모르는 모양인데……."
홍명숙의 입에서 기어코 '부모 없는 근본'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전생에서도 홍명숙은 은채가 조금이라도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은채의 고아 처지를 꼬투리 잡아 죄책감과 열등감을 자극하곤 했다. '네가 부모 복이 없어 배운 게 없으니 내가 사람을 만들어주마'라는 식의 교묘한 가스라이팅.
하지만 이제 그 낡은 칼날은 은채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어머님."
은채가 차분하게 홍명숙의 말을 잘랐다.
"부모 없이 악착같이 제 손으로 번 돈 5천만 원은, 아들 앞세워 남의 피땀을 거저먹으려는 집안의 얄팍한 간판보다 훨씬 값집니다."
"뭐, 뭐라고?!"
"그리고 정정해 드리죠.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은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단추를 단정하게 채운 감색 재킷의 옷자락을 팽팽하게 털어내며, 두 사람을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저는 오늘부로 배도진 씨와의 약혼을 파기합니다. 결혼은 물론이고, 이 점포 계약에 제 돈은 단 10원도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다 못해 산산조각이 났다.
배도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턱을 떡 벌렸고, 홍명숙은 숨이 턱 막힌 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헛기침을 켁켁거렸다.
"파, 파혼이라니? 은채야! 너 지금 제정신이야?!"
도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은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동자에 당혹감과 함께 깊은 공포가 번졌다. 오늘 종로 매장을 계약하지 못하면, 친구들에게 큰소리쳐 둔 것도 수포로 돌아가고, 은채의 돈으로 뽑으려던 새 차도 날아가는 셈이었다. 무엇보다도 은채의 뛰어난 손맛과 부지런함 없이는 자신 혼자 힘으로 식당을 차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은채야, 내가 잘못했어! 어? 명의 문제 때문에 서운해서 그러는 거지? 그래, 좋아! 점포 명의 너로 해줄게! 사업자등록도 공동명의로 하든 네 이름으로 하든 네 마음대로 해! 그러니까 파혼이라는 극단적인 말은 취소해!"
도진이 다급하게 손을 싹싹 빌며 애원조로 매달렸다.
예전 같았으면 이 비굴한 태도에 마음이 약해져 '내가 너무 심했나' 자책했을 은채였다. 하지만 이제 은채의 눈에 비친 배도진은 그저 제 이익을 위해 언제든 얼굴을 바꿀 수 있는 나약하고 기생적인 인간에 불과했다.
"명의를 제 이름으로 해준다고요?"
은채가 냉소했다.
"도진 씨. 내 돈으로 내가 얻는 점포에 내 이름을 올리는 건 '해주는' 게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내 권리예요. 그걸 마치 엄청난 시혜나 양보처럼 말하는 그 태도 자체가 구역질이 납니다."
"은채야……!"
"그리고 명의가 내 것이 된다 한들, 당신과 당신 어머니가 제 주방에 들어앉아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수익을 가로채려 들지 않을 것 같습니까? 지난 1년간 겪어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당신들의 그 뻔뻔하고 기생적인 태도, 이제는 넌더리가 나요."
"이, 이 발칙한 년이……!"
홍명숙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해댔다.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칼이 흐트러질 정도로 흥분한 모습이었다.
"네가 감히 우리 배씨 집안을 모욕해? 네까짓 게 우리 도진이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번듯한 집안에 시집을 갈 수 있을 줄 아느냐? 고아원에 처박혀 있던 년을 거둬서 사람 구실 하게 만들어주려 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당장 무릎 꿇고 빌지 못해?!"
홍명숙의 표독스러운 폭언이 방 안을 쨍쨍하게 울렸다.
청파루의 복도를 지나던 종업원들이 놀라 문틈을 힐끔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은채의 안색은 털끝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민 어린 시선으로 노부인을 담담히 훑어보았다.
"어머님, 착각하지 마세요. 번듯한 집안이라니요? 도진 씨는 3년째 변변한 직장도 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며 제 돈으로 데이트 비용을 썼고, 어머님은 빚더미에 앉은 시동생 사업 자금 메우느라 허덕이고 계시잖습니까. 제가 들어가지 않으면 무너질 집안은 그쪽이지 제가 아닙니다."
홍명숙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집안의 감추고 싶던 치부, 둘째 아들의 빚 문제까지 은채가 정확하게 짚어내자 홍명숙은 할 말을 잃고 헐떡였다. 전생에서 은채의 피를 빨아 메웠던 그 빚더미의 실체를, 은채는 너무나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2005년 10월 14일, 오늘 이후로 제 인생에 배도진 씨와 홍명숙 씨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더 제 주위에 얼씬거리거나 억지를 부리신다면, 제가 가진 모든 증빙 서류를 들고 법적으로 조치하겠습니다."
은채는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조리 연구 일지를 품에 단단히 안아 넣었다.
가죽 표지의 묵직하고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졌다. 이것이야말로 2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켜낸 자신의 진짜 심장이었다.
은채가 가방을 챙겨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도진이 허겁지겁 은채의 옷소매를 잡으려 들었다.
"은채야! 제발 가지 마! 은채야!"
은채는 가차 없이 도진의 손을 쳐냈다. 도진은 중심을 잃고 탁자 모서리에 무릎을 찧으며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상차림을 들고 들어오려던 종업원이 난장판이 된 방 안의 분위기에 질려 문가에서 멈칫했다.
"저, 손님…… 주문하신 점심 한정식 삼인 상 나왔습니다만……."
은채는 멈춰 서서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제가 마신 차 값과 자릿세 3만 원입니다."
종업원에게 정중히 목례한 은채는, 넋이 나가 있는 홍명숙을 향해 마지막으로 차갑게 덧붙였다.
"늘 하시던 대로, 밥값은 제가 내지 않습니다. 어머님이 자랑하시는 그 '번듯한 집안'의 돈으로 도진 씨와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
"너…… 너, 윤은채……! 거기 서지 못해?!"
등 뒤에서 홍명숙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배도진의 다급한 외침이 뒤섞여 터져 나왔지만, 은채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미닫이문을 닫고 나오는 은채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