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차 · 파도
이 글에는 생성형 AI 가 쓴 부분이 있습니다 자세히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계가 오전 세 시 십사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서의 뻑뻑하게 굳은 눈꺼풀 사이로 푸르스름한 빛이 파고들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가을 새벽바람은 서늘했고, 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한 몸에서는 희미한 커피 냄새와 피로의 악취가 났다.
키보드 위에 얹힌 손가락 끝마디가 뻣뻣했다. 화면에는 띄어쓰기를 포함해 십만 자에 달하는 텍스트 문서가 커서를 깜빡이며 열려 있었다.
《검은 숲의 비가》.
그것이 연서가 지난 3년 동안 매달려 온 원작 웹소설의 제목이었다. 그리고 지금 연서가 화면에 띄워 놓은 것은 그 지독하게 비참했던 원작을 제 손으로 뜯어고친 패러디 소설, 이른바 팬픽의 마지막 장이었다.
원작의 결말은 파멸뿐이었다.
주인공인 킬리안 발데크는 북부의 혹한과 황실의 음모 속에서 서서히 미쳐 갔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검을 쥐었으나 끝내 황제에게 배신당했고, 반역자의 오명을 쓴 채 자신의 성채에 불을 질렀다. 그 잔인한 서사 속에서 이름조차 온전히 불리지 못한 하급 시종들과 필사 시녀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단두대로 끌려가 목이 잘렸다.
연서는 그 결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고작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종이와 활자 속에 갇힌 허구의 인물들에게 왜 그토록 연연하느냐고 비웃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연서에게 그 세계는 현실의 시궁창 같은 일상을 견디게 해 준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들이 흘린 피가 아까웠고, 그들이 겪은 억울함이 가슴에 얹혀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킬리안이 광기에 잠식당하지 않는 길을. 누명을 벗고 황실의 간계를 부수는 경로를. 그리고 성채 구석에서 영문도 모른 채 스러져 갔던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건져 올리는 완벽한 구원의 궤적을.
직장에서 돌아와 파김치가 된 몸으로 매일 밤 서너 시간씩 자판을 두드렸다. 설정을 파헤치고, 원작의 연표를 샅샅이 뒤져 사소한 복선 하나까지 주워 담았다. 그렇게 써 내려간 글이 오늘 밤, 드디어 마지막 문장에 도달했다.
연서는 숨을 죽인 채 자판을 눌렀다.
‘그러니 부디, 그대의 밤이 더는 피비린내로 저물지 않기를.’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마침표가 찍혔다.
연서는 마우스를 쥐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이어 게시판의 등록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허탈함과 안도감, 그리고 알 수 없는 서글픔이 한꺼번에 명치 끝을 짓눌렀다.
딸깍.
업로드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창이 떴다.
“……끝났다.”
연서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안도하는 순간, 참아 왔던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며 가슴 한가운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고, 모니터의 하얀 화면이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처럼 일렁였다.
숨이 들이쉬어지지 않았다.
연서는 책상을 짚으려 손을 뻗었으나 허공을 긁었을 뿐이었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쿵 하는 소리가 났지만, 그 충격조차 아득하게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귓가에 남은 것은 모니터 속 텍스트가 바스락거리며 타들어 가는 듯한 기이한 환청이었다.
코끝을 찌른 것은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시큼한 철분 냄새였다.
그리고 지독하게 차가운 공기.
‘……보일러가 꺼졌나?’
연서는 굳어 버린 어깨를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뺨에 닿아 있는 감촉이 이상했다. 차가운 원룸 바닥 장판이 아니었다. 거칠게 대패질 된 단단한 참나무 판자였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버석거리는 양피지 가루가 손끝에 만져졌다.
“엘리아! 또 졸고 있는 게냐?”
날카로운 쇳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연서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목덜미가 뻐근하게 조여들었고 허리뼈가 비명을 질렀다.
눈을 깜빡이자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높은 석조 창문이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는 눈 덮인 거대한 침엽수림과 회색빛 성벽이 끝도 없이 뻗어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목재 서가, 수천 권의 두꺼운 가죽 장정 장부들, 천장에 매달린 채 덜렁거리는 촛대, 그리고 공기 중에 흩날리는 그을음과 말린 잉크 가루.
연서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우스를 쥐고 있던 손이 아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검푸른 잉크로 물들어 있었고, 오른손 중지 옆면에는 단단하고 굳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옷차림 역시 기괴했다. 편안한 면 티셔츠 대신, 거칠고 무거운 회색 모직 원피스에 뻣뻣한 리넨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손목을 단단히 조이는 소매단은 때와 잉크 얼룩으로 거뭇거뭇했다.
“엘리아 발리에!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야?”
성큼성큼 다가온 그림자가 연서의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쾅!
마른 먼지가 피어오르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황동 잉크병이 흔들렸다.
연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겨 검은 보닛 아래로 밀어 넣은, 매서운 눈매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의 가슴팍에는 은색 열쇠 세 개가 짤랑거리는 굵은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헤스터 부인.
그 이름이 연서의 뇌리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원작 《검은 숲의 비가》의 극초반, 북부 발데크 공작령의 제3필사실을 총괄하던 수석 기록관. 깐깐하고 엄격하여 하급 필사 시녀들에게 피눈물을 쏟게 만들지만, 결국 가문이 반역죄로 몰락할 때 서고의 비밀 통로를 열어 주지 않아 기록들과 함께 불타 죽었던 단역.
‘……내가 왜 헤스터 부인을 알아보고 있지?’
연서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연서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맑고 여리지만, 오랫동안 찬 공기를 마셔 쉰내가 섞인 낯선 소녀의 음성이었다.
“죄송하다는 말로 때울 셈이냐? 오늘 정오까지 서부 광산의 군수물자 정산록 정서본을 본관 집무실로 올려야 한다고 몇 번을 일렀거늘! 아직도 석탄 배분표조차 끝내지 못했단 말이냐?”
헤스터 부인이 흑요석 같은 눈으로 책상 위의 양피지를 쏘아보았다.
엘리아. 헤스터 부인이 부른 이름. 그리고 ‘서부 광산의 군수물자 정산록’.
연서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태엽 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듯 기억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엘리아 발리에. 열아홉 살. 발데크 공작가에 소속된 하급 필사 시녀. 글자를 정확하고 빠르게 베껴 쓰는 재주 하나로 거둬졌으나, 집안 배경이 없어 필사실에서도 가장 고되고 먼지가 많은 하급 장부 정리만 도맡아 하던 아이.
그리고…… 원작의 비극이 시작되던 첫 단추.
서부 광산에서 횡령된 유황과 철괴의 수량을 은폐하기 위해 가문의 배신자인 재무관이 조작된 수치를 하급 필사 시녀에게 정서하게 만들었고, 훗날 황실 감찰관이 들이닥쳤을 때 그 장부에 서명한 필사 시녀가 ‘반역을 위한 군수물자 은닉의 공범’으로 지목되어 가장 먼저 효수당했다.
그 무고한 시녀의 이름이 바로 엘리아였다.
‘말도 안 돼.’
연서는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일어났다. 무릎이 책상 모서리에 부딪쳐 둔탁한 통증이 일었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양피지 장부를 움켜쥐었다.
[제국력 742년 10월, 카라스 광산 제3구역 철괴 출납 내역.]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제국력 742년 10월. 원작의 본편이 시작되기 정확히 보름 전이었다. 그리고 킬리안 발데크 공작이 남부 원정을 마치고 성채로 귀환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내가 왜…… 엘리아가 된 거지?’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양피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것은 연서가 밤을 새워 썼던 팬픽의 내용이 아니었다. 구원도, 평화도 시작되지 않은, 피와 음모가 들끓던 원작의 잔혹한 시작점이었다.
“손은 왜 그리 떠는 게냐? 몸이라도 상한 것이냐?”
헤스터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연서의 창백한 안색을 살폈다. 차가운 태도 뒤에 숨겨진 미약한 염려가 묻어났다. 하지만 이 여인은 알지 못한다. 지금 이 장부에 적힌 숫자들이 몇 달 뒤 자신을 포함한 필사실 전체를 단두대로 몰고 갈 도화선이라는 사실을.
“아닙니다, 부인. 손이…… 손이 조금 곱아서 그렇습니다.”
연서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 당장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지른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지하 감옥에 갇힐 뿐이다. 이곳은 현대의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인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공작의 말 한마디, 기록관의 서명 하나로 목숨이 파리처럼 날아가는 살벌한 북부의 요새였다.
‘살아야 해.’
연서는 이를 악물었다.
소설 속으로 들어왔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장부를 그대로 베껴 쓰는 순간, 엘리아의 사형 집행 영장에 제 손으로 서명하는 꼴이 된다.
“정오까지…… 본관에 제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공작 전하께서 정오에 성채에 당도하신다. 집무실에 도착하시자마자 지난 반년 치의 서부 군수 물동량을 점검하실 것이다. 델란 재무관님께서 직접 확인하시고 전하께 올릴 서류이니 오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델란 재무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연서의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황실의 끄나풀. 발데크 가문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십 년간 충복 행세를 하며 장부를 조작해 온 뱀 같은 사내.
원작에서 델란은 유황과 흑색 화약의 밀반출 내역을 ‘폐기 처분’으로 둔갑시켰고, 그 조작된 최종본을 엘리아의 손으로 필사하게 만든 뒤 원본을 불태워 버렸다. 훗날 황실 감찰단이 들이닥쳤을 때 델란은 “하급 시녀가 숫자를 잘못 기재하여 착오가 생겼다”라며 모든 책임을 엘리아에게 뒤집어씌웠다.
엘리아는 자신이 무엇을 베껴 썼는지조차 모른 채 혀가 잘리고 목이 베였다.
‘그 장난질에 놀아나 줄 수는 없어.’
연서는 심호흡을 하며 책상 위의 깃펜을 쥐었다.
익숙하지 않은 깃펜이었지만, 엘리아의 몸에 밴 감각 덕분인지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펜대를 감싸 쥐었다.
“알겠습니다, 부인. 지금 즉시 정서를 시작하겠습니다.”
헤스터 부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연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몸을 돌렸다.
“딴생각 말고 손을 놀려라. 촛불이 부족하면 서고 안쪽에서 밀랍초를 더 가져다 쓰도록 해.”
“예, 부인.”
헤스터 부인의 무거운 구두 굽 소리가 필사실의 차가운 돌바닥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이 닫히자 거대한 필사실 안에는 오직 연서 혼자만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연서는 버티고 서 있던 다리에서 힘을 풀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생각해, 한연서. 아니, 엘리아.’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세 권의 장부를 빠르게 훑었다.
첫 번째는 광산 현장에서 올라온 원본 거친 장부(초안). 두 번째는 델란 재무관의 서명이 들어간 중간 집계표. 그리고 세 번째가 지금 그녀가 정서해야 하는 최종 제출용 양피지였다.
연서는 원작을 쓰기 위해, 그리고 패러디 소설을 쓰기 위해 수없이 분석했던 발데크 가문의 경제 구조와 무기 체계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