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 파도
이 글에는 생성형 AI 가 쓴 부분이 있습니다 자세히
발데크 가문의 모든 군수 물자는 고유의 식별 부호 체계를 따랐다.
원작 속 킬리안 발데크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군수 보급에 철저한 인물이었다. 혹독한 북부의 겨울을 나기 위해 철괴 한 덩이, 유황 한 자루의 이동 경로까지 직접 확인하는 사내였다. 그런 그를 속이기 위해 델란 재무관이 썼던 수법은 아주 교묘하고도 단순했다.
‘숫자를 통째로 지우는 게 아니야. 경로를 비틀어 유령 창고로 빼돌리는 거지.’
연서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세 장부를 나란히 펼쳤다.
첫 번째 장부인 광산 현장 초안. 카라스 광산 채굴 감독관의 투박한 필체로 적힌 기록이었다. [10월 3일, 정제 고순도 유황 400상자 출하. 행선지: 성채 제1군수창.] [10월 7일, 무연탄 800포대 및 단조 철괴 1,200근 출하. 행선지: 성채 제1군수창.]
하지만 델란이 작성한 중간 집계표에는 전혀 다른 숫자가 적혀 있었다. [10월 5일, 카라스 고개 산사태로 인한 유황 400상자 전량 침수 및 폐기 처리.] [10월 9일, 운송 마차 축 파손으로 인한 철괴 1,200근 협곡 유실.]
손실률 백 퍼센트. 겉보기에는 험준한 북부의 지형 탓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운송 사고처럼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연서는 알고 있었다. 그 유황과 철괴는 협곡으로 굴러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북부의 국경을 넘어 황실 직속 친위대의 비밀 조병창으로 흘러들어 갔다. 황실은 발데크의 자원으로 몰래 사병을 무장시키고, 훗날 이 장부를 들이밀며 “발데크 공작이 황실 몰래 군수물자를 빼돌려 반역을 도모했다”라는 죄를 뒤집어씌울 터였다.
‘그리고 그 죄를 완성하는 마지막 열쇠가 바로 이 정서본이지.’
연서는 빈 양피지 하단을 응시했다.
정서본 마지막 장에는 필사 시녀의 고유 인장과 서명을 남기는 난이 마련되어 있었다. [기록 필사자: 엘리아 발리에.]
발데크 공작령 규약 제14조. ‘모든 물동량 정산록의 필사자는 원본과 정서본의 일치 여부를 대조 검증할 의무를 지니며, 허위 기재가 발생할 시 원본 파기 및 위조의 정범으로 다스린다.’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덫이었다.
하급 필사 시녀는 상부에서 내려온 중간 집계표를 그대로 베껴 쓸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광산 초안과 중간 집계표를 직접 대조하여 검증한 뒤 정서한 자’로 규정된다. 델란은 엘리아의 손을 빌려 조작된 수치를 공문서로 둔갑시키고, 원본 초안을 불태워 인멸한 뒤 모든 법적 책임을 이 힘없는 소녀에게 떠넘길 계획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연서는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당장 델란의 조작을 고발하겠다고 헤스터 부인이나 다른 기록관에게 달려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필사실의 하급 시녀가 영지의 총재무관을 고발한다? 증거는커녕 미친 계집의 헛소리로 치부되어 당장 지하실로 끌려가 매를 맞고 혀가 뽑힐 게 뻔했다. 델란의 손길은 이미 성채 행정관들의 절반 이상에 닿아 있었다.
그렇다고 정서본에 광산 초안의 진짜 숫자를 그대로 적어 넣는 것도 불가능했다. 장부는 집무실로 올라가기 전, 델란의 집무 책상을 먼저 거친다. 델란이 검수하는 순간 수치가 바뀐 것을 알아채고 즉시 양피지를 찢어버린 뒤, 엘리아를 반역 음모의 끄나풀로 몰아 성벽 아래로 던져버릴 것이다.
‘델란의 눈은 속이고, 킬리안 공작의 눈에는 띄어야 해.’
방법이 있어야 했다. 그녀가 지난 3년간 써 내려갔던 수십만 자의 설정, 킬리안의 성격, 발데크 성채의 행정 체계, 필사 시녀들이 사용하는 암묵적인 기록 규칙.
머릿속의 기억들을 미친 듯이 헤집던 연서의 뇌리에 한 줄기 서광이 번뜩였다.
‘……로트 번호.’
원작 속 킬리안 발데크는 광산에서 생산되는 모든 철괴와 화약 원료에 찍히는 ‘제련 번호’를 병적으로 대조하는 습관이 있었다. 남부 전선에서 부실한 무기 탓에 수많은 부하를 잃었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광산 현장에서 유황과 철괴가 출하될 때 부여되는 고유의 식별 부호. 델란은 중간 집계표에서 총수량과 손실 사유는 교묘하게 조작했으나, 하급 시녀가 굳이 옮겨 적지 않아도 되는 세부 출납 일련번호까지는 일일이 통제하지 않았다.
연서는 깃펜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려 왔지만,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는 순간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냉정이 온몸을 지배했다.
‘나는 살아야 해. 이깟 잉크와 종이 쪼가리에 목이 잘릴 수는 없어.’
그녀는 델란이 요구한 대로 숫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황 400상자 폐기. 철괴 1,200근 유실.
델란이 원하는 거짓을 완벽하게 양피지 위에 그려 넣었다. 하지만 비고란의 여백, 필사 시녀들이 통상적으로 줄을 맞추기 위해 남겨두는 좁은 괘선 사이에 아주 작은 글씨로 주석을 달았다.
[폐기 승인 코드: K-03-A.] [유실 보고 로트: K-07-B.]
그것은 단순한 폐기 분류 부호가 아니었다. 카라스 광산 제3구역에서 ‘남부 원정군 최우선 보급용’으로 특별 제련된 최상급 철괴와 고순도 유황에만 부여되는 특수 각인이었다.
만약 킬리안이 이 장부를 본다면? ‘산사태로 젖어 폐기되었다는 유황’에 최정예 부대의 보급 각인이 찍혀 있고, ‘협곡으로 굴러떨어졌다던 철괴’가 하필이면 공작 직속 기사단의 갑주용 강철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최정예 부대의 보급품은 일반 수송대가 아니라 공작 가문의 직속 호위 기사들이 운송을 전담한다. 산사태 따위로 전량 유실될 리가 없는 물품이었다.
숫자는 델란이 준 조작 그대로였으나, 그 숫자를 구성하는 부호는 델란의 목을 벨 칼날이 되어 박혔다.
사각, 사각.
정적만이 감도는 필사실 안에서 깃펜이 양피지를 긁는 소리만이 날카롭게 울렸다. 연서의 손가락 끝마디가 잉크로 새까맣게 물들었다. 굳은살이 박인 자리가 욱신거리며 타는 듯한 열감을 뿜어냈지만 멈추지 않았다.
오전 열한 시를 알리는 성채의 묵직한 청동 종소리가 세 번 울렸을 때, 마침내 마지막 줄의 잉크가 말라붙었다.
연서는 양피지 하단에 엘리아의 서명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제3필사실의 하급 계인(契印)을 붉은 밀랍 위에 꾹 눌렀다.
완성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단계가 남아 있었다.
‘원본 초안.’
델란은 정서본을 회수하면서 반드시 카라스 광산의 원본 초안을 함께 거두어 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집무실 벽난로에 던져 재로 만들어 버릴 터였다. 증거가 사라지면 훗날 진실을 증명할 방법이 영원히 사라진다.
연서는 숨을 죽인 채 서고 구석의 선반으로 다가갔다. 양피지 사이에 끼워두는 기름종이, 즉 얇은 반투명 사본용 유산지 두 장을 꺼냈다.
그녀는 원본 초안 위에 유산지를 얹고, 잉크가 묻지 않은 빈 쇠 펜촉으로 원본의 글씨를 꾹꾹 눌러 덧썼다. 종이에 깊게 파일 정도로 강한 압력을 주어 누르자, 유산지 표면에 미세한 요철로 글씨의 윤곽이 그대로 새겨졌다.
잉크가 묻지 않아 언뜻 보면 그저 구겨진 파지처럼 보이지만, 흑연 가루나 그을음을 살짝 문지르면 원본의 모든 글자와 광산 감독관의 직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압인 사본이었다.
연서는 차갑게 식은 심장을 억누르며, 그 유산지를 곱게 접어 자신의 뻣뻣한 리넨 앞치마 안쪽 솔기 틈새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차디찬 종이가 아랫배에 닿는 순간, 거친 철문 너머로 무거운 발구름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필사실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차가운 복도의 한기와 함께 들이닥친 것은 짙은 사향 냄새와 기름진 비단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였다.
“엘리아 발리에.”
미끈거리는 뱀의 비늘 같은 목소리. 델란 재무관이었다.
갈색 턱수염을 정갈하게 다듬고 금빛 테두리가 둘러진 녹색 벨벳 외투를 걸친 사내였다. 그의 가슴팍에는 발데크 가문의 재정을 총괄하는 황금 열쇠 휘장이 번쩍이고 있었다.
원작에서 엘리아를 단두대로 밀어 넣었던 장본인.
연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하급 필사 시녀가 고위 귀족이자 상관을 대할 때 보여야 하는 전형적인 위축된 태도였다.
“재무관님을 뵙습니다.”
“장부는. 다 끝났느냐?”
델란은 필사실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오며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었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세 권의 장부에 닿았다.
“예, 나으리. 방금 정서를 마치고 계인을 찍었습니다.”
연서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완성된 정서본을 들어 올려 델란에게 내밀었다.
델란은 장갑을 낀 손으로 거칠게 양피지를 낚아챘다. 그는 선 채로 장부의 첫 장부터 빠르게 넘겼다. 총수량, 폐기 사유, 그리고 마지막 장에 찍힌 엘리아의 서명과 하급 계인.
델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오탈자는 없겠지?”
“부인께서 엄히 이르신 대로, 한 글자도 빠짐없이 중간 집계표의 수치와 정확히 일치하도록 적었습니다.”
연서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눈앞의 사내가 언제라도 자신의 목을 벨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다는 공포는 진짜였다.
델란은 그 떨림을 단순한 하급 시녀의 경외와 두려움으로 받아들인 듯, 낮게 혀를 차며 장부를 덮었다.
“수고했다. 천한 계집치고는 손이 제법 빠르군.”
그는 시선을 돌려 책상 한구석에 놓인 광산 현장 초안을 집어 들었다.
“이 거친 초안은 서고에 둘 필요가 없다. 규격에 맞지 않는 파지는 화로에 넣어 처리하도록 하지.”
예상했던 대로였다. 델란은 품에서 작은 부싯돌을 꺼내 들었다. 이 자리에서 원본을 태워 재로 만들 셈이었다.
연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넘겨야 했다.
“나으리, 필사실 규정상 초안을 파기할 때에는 서고 폐기 대장에 일련번호를 기재해야…….”
“네깟 계집이 감히 내게 규정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델란의 서늘한 음성이 정적을 찢었다. 그의 눈빛에 섬뜩한 살기가 스쳤다.
연서는 즉시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를 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마가 차가운 돌바닥에 닿았다. 델란은 바닥에 엎드린 연서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더니, 흥, 코웃음을 치며 부싯돌을 쳤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고, 광산 원본 초안의 모서리에 붉은 불길이 옮겨붙었다. 델란은 타들어 가는 양피지를 필사실 구석의 황동 화로 속으로 무심하게 던져 넣었다.
건조한 양피지는 순식간에 검은 재로 바스러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진실을 증명할 유일한 원본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델란은 재가 되어 날리는 파편을 차갑게 내려다본 뒤, 품에 정서본을 챙겨 넣고 몸을 돌렸다.
“공작 전하께서 도착하셨다. 네놈은 이곳을 정리하고 정오 기도가 끝날 때까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마라.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나으리.”
델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철문이 쾅 닫혔다.
완벽한 적막.
연서는 그제야 바닥을 짚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