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차 · 샤인
수정 거부된 세계
이 글에는 생성형 AI 가 쓴 부분이 있습니다 자세히
회사의 인사과 사무실에는 값비싼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풍기는 냄새는 썩은 플라스틱처럼 메마르고 역겨웠다.
“한도진 씨. 이번 ‘프로젝트 네오’ 정기 감사 결과가 썩 좋지 않아요.”
인사팀장은 결재판을 톡톡 두드리며 기름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뒤편의 벽걸이 모니터에는 전 세계 동시 접속자 1억 명을 돌파했다는 <아르카디아>의 화려한 홍보 영상이 무음으로 번쩍였다.
“보고서 누락에, 승인되지 않은 비인가 디버깅 툴 사용 의혹까지. QA 1팀 수석이라서 믿고 맡겼더니 실망이 큽니다.”
누락? 비인가 툴? 한도진은 텁텁한 입안의 침을 삼켰다. 지난 3년간 그가 잡아낸 크리티컬 버그만 수천 건이었다. 메인 엔진의 스레드 충돌, 지형 관통 버그, 메모리 누수로 인한 강제 셧다운 현상까지. 상용화 일정을 맞추겠다며 위에서 ‘WNF(Won't Fix, 수정 거부)’ 도장을 찍어 덮어버린 결함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대가가 이것이었다. 신임 본부장의 라인을 타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작된 감사 보고서.
“사직서에 서명하시죠. 좋게좋게 갑시다. 개발자 바닥 좁은 거 아시잖습니까?”
도진은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이 검은 화면에 비쳤다. 후줄근한 집업 트레이닝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는 헛웃음을 삼켰다.
반박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사내 정치는 이미 끝났고, 제물은 자신으로 정해져 있었다.
“……좋습니다.”
도진은 전자펜을 들어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그렇게 도진은 3년을 쏟아부었던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 텁텁한 입안을 헹구며 일어난 도진의 모니터에는 때마침 오늘부터 시작되는 <아르카디아>의 비공개 익스트림 베타 테스트 알림이 떠 있었다. 사내 망 권한은 잘려 나갔지만, 개발용으로 연동해 두었던 개인 계정은 인사팀의 허술한 전산 처리 탓에 여전히 로그인 가능한 상태였다. 그 안에는 지난 3년간 자신이 직접 찾아내고도 사측의 묵살로 ‘WNF’ 도장이 찍혔던 수천 건의 버그 보고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회사가 덮어버린 결함들을 제 손으로 낱낱이 끄집어내 그들의 오만함을 비웃어 주는 것. 그것이 도진이 바라는 유일한 골탕 먹이기이자 퇴직금이었다.
* * *
원룸 한구석에 놓인 캡슐형 가상현실 다이브 기기, ‘뉴로기어 4세대’의 푸른색 인디케이터가 깜빡였다.
도진은 차가운 캡슐 시트에 몸을 뉘었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 그대로였다. 목덜미에 닿는 젤 패드의 감촉과 함께 기계음이 귓전을 울렸다.
[사용자 생체 신호 동기화율 99.8%.] [<아르카디아> 익스트림 클로즈드 베타 서버에 접속합니다.] [시각, 청각, 촉각을 포함한 5대 감각 피드백 수치가 기본값(100%)으로 설정됩니다.]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완전 몰입형 가상현실 특유의 부유감이 지나가고, 도진은 자신의 발이 단단한 바닥을 딛고 있음을 느꼈다. 콧잔등을 스치는 공기는 서늘했고, 미세한 금속성 냄새와 축축한 흙냄새가 뒤섞여 풍겨왔다.
도진이 눈을 떴다.
“……뭐야, 여긴.”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화려하고 광활한 <아르카디아>의 튜토리얼 초원이나 신전이 아니었다. 사방이 거대한 정육면체 금속 블록으로 둘러싸인, 음침하고 기괴한 밀실이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방. 벽면에는 알 수 없는 기계 장치와 복잡한 배관들이 핏줄처럼 얽혀 있었고, 천장 중앙에는 희미하게 점멸하는 붉은색 비상등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방의 벽면 한가운데에는 각각 하나씩, 두꺼운 금속 해치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큐브의 내부에 갇힌 듯한 형태였다.
“으, 머리야…….” “여기가 베타 튜토리얼 맵 맞아? 왜 이렇게 어두워?”
도진의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도진은 자신 외에도 방 안에 스무 명 남짓한 유저들이 함께 스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사, 마법사, 궁수 등 각양각색의 초기 장비를 걸친 유저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인터페이스가 이상한데?” 한 남성 유저가 허공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로그아웃 창이 왜 비활성화되어 있어? 야, 튜토리얼 스킵 버튼도 안 눌려!”
그 말에 다른 유저들도 일제히 허공에 손을 뻗어 시스템 메뉴를 띄웠다. 여기저기서 낭패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짜네? 렉인가?” “이봐요! 감각 피드백도 100%로 고정되어 있는데? 안전장치는 어디 간 거야?”
공포는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도진은 침착하게 허공을 톡 쳐서 시스템 UI를 호출했다.
[상태창] - 이름: 한도진 - 직업: 무직 (튜토리얼 미완료) - 레벨: 1 - HP: 100 / 100 - MP: 50 / 50
로그아웃 버튼은 잿빛으로 죽어 있었고, 긴급 탈출(Emergency Eject) 탭에는 붉은색 경고 마크가 박혀 있었다. 도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단순한 서버 불안정이나 렌더링 오류가 아니었다. 클라이언트 레벨에서 강제로 권한을 회수한 형태였다.
‘인공 신경망 접속 통제. 피드백 리미터 해제.’
이것은 정상적인 게임 빌드가 아니었다. 개발 서버의 격리 구역, 혹은 상용화 전 스트레스 테스트를 위해 극단적인 환경으로 봉인해 둔 위험 구역의 데이터였다.
그때, 천장의 스피커에서 거친 노이즈와 함께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치이익- 치익.
[……익스트림 클로즈드 베타에 오신 테스터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본 테스트는 ‘극한 환경에서의 생체 반응 및 시스템 적응도’를 측정하기 위한 비공개 프로세스입니다.] [모든 참가자는 단계별 격리 구역(큐브)을 돌파하여 중앙 코어에 도달해야 합니다.] [주의: 사망 시 신경계 과부하로 인한 강제 셧다운이 발생할 수 있으며, 시스템 안정화 전까지 임의 접속 종료는 불가합니다.]
“미친, 이게 무슨 개소리야!” 거대한 양손검을 든 사내가 스피커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당장 접속 끊어! 나 내일 출근해야 한다고! 운영자 새끼들아, 장난쳐?!”
사내가 분을 참지 못하고 북쪽 벽면의 금속 해치로 다가가 손잡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무거운 금속음과 함께 해치가 열렸다. 그 너머로 보이는 다음 방은 푸르스름한 형광 이끼로 뒤덮인 또 다른 정육면체 방이었다.
“어이! 열리잖아? 그냥 이딴 좆같은 튜토리얼 빨리 깨고 나가면 그만이지!” 사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치 너머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도진의 시선이 사내의 발밑, 바닥 타일의 미세한 틈새로 향했다. 타일 표면의 텍스처가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지며 미세하게 좌표값이 떨리고 있었다.
“멈춰요.” 도진이 낮게 경고했다.
그러나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찐따 같은 게.”
사내의 발이 타일의 정중앙을 밟은 찰나.
철컥!
기괴한 기계음과 함께 바닥에서 수십 개의 강철 가시가 솟구쳤다.
푸쉬이익!
“끄아아아악-!” 사내의 양다리와 복부가 순식간에 관통당했다.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금속 벽면을 적셨다. 완전 몰입형 캡슐의 피드백 100%가 적용된 끔찍한 고통에 사내는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경고: 파티원 ‘강철의검’ 심각한 신경 충격 감지.] [생명력이 0에 도달했습니다.]
사내의 몸이 픽 쓰러지며 붉은빛 파편으로 산산조각 나 사라졌다. 바닥에는 핏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 지독한 피비린내를 풍겼다.
“히익……!” “사, 사람 살려! 진짜 죽는 거 아니야?!”
방 안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여성 마법사 유저는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유저들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죽으면 현실의 뇌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덫이었다.
“너, 너 아까 알고 있었지?” 도끼를 든 험상궂은 인상의 유저 하나가 도진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알고 있었으면 진작 말렸어야지! 네가 죽인 거나 다름없잖아!”
도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다가오는 남자의 손목을 툭 쳐내며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경고했잖아. 안 듣고 냅다 밟은 건 그쪽 동료고.” “뭐, 임마?!” “그리고 멱살 잡을 시간에 바닥이나 봐. 아직 안 끝났으니까.”
도진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사내가 흠칫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위이이잉-!
방 전체가 거대한 진동과 함께 울리기 시작했다. 천장의 붉은 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경고음을 쏟아냈다.
[경고: 튜토리얼 룸 #004 구역의 ‘정리 시퀀스’가 활성화됩니다.] [제한 시간 내에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지 않을 시, 방 전체가 압착됩니다.] [남은 시간: 02분 00초]
천장이 천천히, 그러나 육중한 압력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쿵…… 쿵……!
“으아악! 천장이 내려와!” “열려 있는 문으로 가야 해! 저기 가시 트랩이 있잖아!” “그럼 남은 세 개 문 중에 아무거나 열어봐!”
공포에 질린 유저들이 남쪽과 동쪽, 서쪽의 해치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손잡이는 붉은빛을 띄며 덜컹거릴 뿐 열리지 않았다.
[잠금 상태: 북쪽 통로의 기믹을 해제해야 다른 출구가 개방됩니다.]
“북쪽밖에 없잖아! 그런데 저 방은 가시투성이라고!” 유저들이 울부짖었다. 가시가 솟구쳤던 북쪽 방은 여전히 피비린내를 풍기며 서늘한 살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가시가 들어간 자리의 바닥 타일들은 복잡한 퍼즐처럼 엇갈려 있었고, 어떤 타일이 함정인지 겉으로는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남은 시간: 01분 30초]
천장이 이미 성인 키 높이까지 내려앉고 있었다. 유저들은 허리를 굽힌 채 패닉에 빠져 서로를 밀치고 아우성쳤다.
“누가 먼저 가서 밟아봐! 함정 위치를 알아내야 건너갈 거 아냐!” “미쳤어? 밟으면 죽는데 그걸 왜 내가 해! 네가 가!” “이 새끼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밀어 넣으려는 아수라장 속에서, 도진은 홀로 북쪽 해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방대한 양의 QA 데이터가 스쳐 지나갔다. 2년 전, 물리 엔진 ‘하복-넥서스’를 아르카디아에 통합할 당시 발생했던 고질적인 문제.
‘타일 기반 인스턴스 던전의 히트박스 판정 오류.’ 보고서 번호: #QA-2041-0889. 처리 결과: WNF (수정 거부).
당시 개발 총괄은 ‘유저가 일부러 벽면에 비비며 프레임 드랍을 유도하지 않는 이상 발생할 확률 0.001% 미만’이라며 수정을 거부하고 덮어버렸다.
도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수정 거부라 이거지.”
그는 인벤토리에서 기본 지급 장비인 목검을 꺼냈다. 불법 프로그램 따위는 필요 없었다. 게임 엔진 자체가 품고 있는 구조적 결함, 그것이야말로 시스템이 인정한 합법적인 물리 법칙이었다.
도진은 양손으로 목검의 끝을 쥐고, 북쪽 방의 입구 좌측 모서리를 응시했다.
벽면과 바닥 타일이 90도로 맞닿는 지점. 텍스처 렌더링이 1픽셀 정도 겹쳐 있는 모서리 틈새. 그곳은 물리 엔진이 플레이어의 충돌 판정(Collsion Box)을 계산할 때 부동소수점 오차가 발생하는 유일한 사각지대였다.
[남은 시간: 00분 50초]
천장이 어깨를 짓누를 듯이 내려왔다. 유저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야! 거기 까치집 머리! 뭐 하는 거야! 살려줘!” “제발 아무나 문 좀 열어봐!”
도진은 뒤편의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벽면 모서리를 향해 캐릭터의 시야 각도를 정확히 43.5도로 틀었다. 가상현실 속 오감 피드백이 100%였기에, 1도 단위의 미세한 각도 조절은 끔찍할 정도의 집중력과 공간 지각력을 요구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내뱉고, 제자리에서 짧게 스텝을 밟았다.
타닥.
좌측 대각선 전진, 즉시 우측 방향 전환, 그리고 0.1초 단위의 가속 캔슬.
‘프레임 스킵 글리치.’
순간, 도진의 시야가 뚝 끊기듯 번쩍였다.
현실의 뇌파와 캡슐 센서가 엇갈리며 물리 엔진이 그의 위치 좌표를 잠시 허공에 뜬 것으로 오인했다. 도진의 캐릭터 판정이 바닥 타일의 압력 센서(트랩 발동 콜라이더)를 통과하지 않고, 타일 ‘위’가 아닌 타일 ‘사이의 경계선’을 타고 미끄러지듯 질주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도진의 신형이 허공을 미끄러지듯 북쪽 방의 벽면을 타고 번개처럼 쇄도했다. 바닥의 가시 트랩들이 도진의 발밑에서 덜컹거리며 작동하려 했으나, 트리거가 발동되기도 전에 이미 도진의 좌표는 다음 타일로 넘어가 버린 상태였다.
찰나의 순간, 도진은 방 반대편에 위치한 제어 콘솔 앞에 착지했다.
탁!
바닥을 딛는 도진의 발소리와 함께, 북쪽 방 중앙의 함정 제어 레버가 도진의 손에 잡혔다.
쩌저적!
도진이 거침없이 레버를 아래로 꺾었다.
쿠구구구궁-!
방 전체를 짓누르던 천장의 하강이 멈췄다. 바닥에서 솟구치려던 수백 개의 강철 가시들이 일제히 바닥 밑으로 빨려 들어가며 고요가 찾아왔다.
[남은 시간: 00분 08초] [알림: 튜토리얼 룸 #004 구역의 기믹이 해제되었습니다.] [북쪽 및 모든 연결 통로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등 뒤에서 짓눌려 죽을 뻔했던 테스터들이 멍하니 도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뭐야?” “방금 저 사람, 어떻게 지나간 거야? 날아간 건가?” “핵이야? 핵 쓴 거 아냐?!”
웅성거림과 의구심,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도진은 뻐근해진 손목을 털며 무미건조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다크서클 아래의 눈동자에는 흥분도, 성취감도 없었다. 오직 차갑게 가라앉은 계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도진이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니들이 그렇게 빨아재끼던 대기업 개발진이, 야근하기 싫어서 WNF 때려 박고 쳐 묵살한 물리 엔진 버그다.”
* * *
도진의 거침없는 돌파로 살아남은 테스터들은 엉금엉금 기어 북쪽 방으로 넘어왔다. 방금 전까지 도진에게 삿대질을 하던 험상궂은 도끼 유저도 입을 꾹 다문 채 도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봐……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개발자 출신이야? 아니면 유명 랭커?”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도진은 대답 대신 다음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열린 해치 너머로 펼쳐진 공간은 이전 방보다 훨씬 거대했다. 정육면체의 방들이 상하좌우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미궁.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는 굉음과 다른 구역 테스터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단순한 탈출 게임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시스템을 뒤틀어 테스터들을 한계까지 몰아넣고 있었다.
‘운영총괄 최수아 실장…… 네 짓인가?’
도진의 머릿속에 칼단발에 날카로운 안경을 쓴 채, 지표와 통제만을 부르짖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버의 비정상적인 로그를 덮고 극단적인 생체 데이터를 뽑아내기 위해 테스터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짓. 그녀라면 충분히 결재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다들 멍청하게 서 있지 마.” 도진이 목검을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여긴 정규 튜토리얼이 아니라 폐기된 더미 데이터 구역이야. 룰대로 플레이하면 100% 죽어나간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마법사 유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어둠이 짙게 깔린 다음 큐브의 입구를 가리켰다.
“룰을 부숴야지.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개구멍만 골라서 밟고 간다.”
그의 발걸음이 망설임 없이 다음 방의 경계선을 향해 내딛어졌다. 시스템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거대한 미궁의 심연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