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님의 몽둥이는 참지 않는다.2회차

2회차 · 소리

참지 않는 몽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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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들어온 것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불곰에 가까운 사내였다. 집채만 한 덩치, 굵직한 턱수염, 그리고 은빛이 섞인 흑발을 휘날리는 중년 남성이 침대로 맹렬하게 돌진해 왔다.

"로잘린! 내 딸, 로잘린! 오, 신이시여! 마침내 눈을 떴구나!"

루드비히 공작은 무릎을 꿇고 침대 모퉁이에 털썩 엎드리더니,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로잘린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제국 최강의 무가이자 북부의 지배자라 불리는 아르젠트 공작가의 가주, 루드비히 폰 아르젠트 공작이었다. 전장에서는 적들의 목을 단칼에 베어 넘기는 살인귀로 악명 높은 사내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딸의 실신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가련한 아비에 불과했다.

"의원! 의원은 어디 갔느냐! 당장 공녀의 맥을 짚어라!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면 네놈의 목을 광장에 매달아 버릴 테다!"

"고, 공작 전하! 공녀 전하께서는 열이 완전히 내리셨습니다! 맥박도 지극히 정상이며 오히려 전보다 훨씬 힘이 넘치십니다!"

하얗게 질린 전속 의원이 바들바들 떨며 외쳤다. 로잘린은 멍하니 눈을 굴렸다. 머릿속으로 낯선 기억과 지식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칼과 마법, 신분과 권력이 지배하는 판타지 세계의 제국. 그리고 자신이 빙의한 이 육체는 제국 최강의 권력을 쥔 아르젠트 공작가의 하나뿐인 외동딸, 로잘린 폰 아르젠트였다.

‘내가…… 공작가의 금지옥엽 외동딸이라고?’

로잘린은 침대 옆에 놓인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미녀가 있었다. 탐스러운 은빛 머리칼이 허리까지 찰랑거렸고, 뽀얀 백옥 같은 피부에 서릿발처럼 서늘한 자수정빛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위암 선고를 받고, 십 년 동안 남편 빚을 갚느라 뼈 빠지게 일하다 농약을 마시고 비참하게 살해당했던 윤서진의 껍데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아버지?"

로잘린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낯선 단어를 뱉어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루드비히 공작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오오, 그래! 내가 네 애비다! 아가, 몸은 좀 어떠냐? 목이 마르진 않느냐? 배는 고프지 않아? 제국 최고의 요리사를 불러서 만찬을 준비시킬까? 황궁에 있는 엘릭서를 털어올까?"

"아닙니다. 몸은…… 아주 가볍습니다. 오히려 너무 상쾌해서 날아갈 것 같아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속이 뒤틀리고 썩어 들어가던 통증은 완벽히 사라졌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넘쳐흐르는 것은 미지의 생명력과 팽팽한 활력이었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힘줄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전생에 평생을 짓누르던 울화와 피로감이 눈 녹듯 사라지자, 머릿속이 얼음물에 헹군 것처럼 맑아졌다.

‘살았다.’ ‘그리고…… 이번 생은 완전히 다르다.’

로잘린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전생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바람피우고 빚만 떠넘기던 남편 강민철. 사사건건 트집 잡으며 피를 빨아먹던 시어머니 박순임. 남을 위해 참고, 배려하고, 헌신하다가 돌아온 대가는 끔찍한 배신과 농약 살해였다.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된다.’ ‘참으면 화병으로 죽는다.’

로잘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자수정빛 눈동자에 서늘하고도 기괴한 광기가 번뜩였다.

‘이번 생의 목표는 단 하나다.’ ‘남을 위한 희생? 배려? 현모양처? 개나 줘버려라.’

로잘린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드비히 공작이 기겁하며 로잘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로잘린!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 누워 있거라, 제발!"

"아버지, 저는 멀쩡합니다. 아니, 멀쩡한 수준을 넘어서 피가 끓어오릅니다."

"피, 피가 끓는다고? 혹시 열병이 재발한 것이냐?"

"아니요. 운동이 하고 싶습니다."

"뭐?"

"검을 잡아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가겠습니다."

루드비히 공작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동안 로잘린은 공작가의 딸치고는 얌전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칼을 무서워하지는 않았으나, 이토록 눈을 희번덕거리며 연무장으로 달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딸바보 루드비히 공작의 뇌 회로는 비범했다.

"오오……! 내 딸이 드디어 아르젠트의 피를 각성했구나! 그래, 가자! 네가 원한다면 공작저의 연무장을 통째로 개조해 주마!"

공작저 중앙 연무장은 광활했다. 로잘린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바지와 훈련용 셔츠로 갈아입었다. 은발을 높게 포니테일로 묶어 올린 모습은 영락없는 미모의 여전사였다.

무기 거치대 앞에 선 로잘린은 묵직한 훈련용 목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손에 쥐자마자 착 감겨오는 묵직한 무게감.

‘좋아.’

로잘린은 숨을 들이쉬며 전방에 서 있는 통나무 허수아비를 노려보았다. 전생에 쌓였던 십 년 묵은 울화통이 가슴속에서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강민철의 비열한 웃음. 박순임의 찢어지는 악다구니. 농약 냄새와 내장이 타들어 가던 고통.

‘죽어라, 쓰레기 새끼들아!’

콰아앙!

로잘린의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한 휘두름이었으나, 몸속에 잠재되어 있던 아르젠트 가문의 강력한 오러가 목검을 타고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두꺼운 참나무로 만든 허수아비가 굉음과 함께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뿜어냈다.

연무장에 도열해 있던 공작가 기사들이 턱이 빠질 듯 입을 떡 벌렸다.

"허, 헉……! 참나무 허수아비를 단 일격에?" "오러를 검에 두른 것도 아닌데 순수 완력과 기합만으로 저걸 쪼갰다고?"

기사들의 경악 섞인 수군거림 속에서, 관람석에 앉아 있던 루드비히 공작이 벌떡 일어나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브라보! 완벽하다! 역시 내 딸이야! 대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기사가 태어났다!"

로잘린은 쪼개진 허수아비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과 통나무가 박살 나는 소리. 가슴속에 얹혀 있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거다. 이게 바로 인생이지.’

말보다 주먹. 대화보다 몽둥이. 권력과 무력이 이렇게나 달콤한 것인 줄 알았다면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

그때, 연무장 입구 쪽에서 공작가의 시종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시종장은 박살 난 허수아비와 목검을 든 로잘린의 서슬 퍼런 모습을 보고 힉 소리를 내며 멈칫하더니, 이내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가주 전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내 딸의 신성한 수련 시간에 감히 누가 찾아왔단 말이냐?"

"폴록 백작가의 영식, 체스터 폰 폴록 님이 공녀 전하의 쾌유를 위해 접견을 요청하셨습니다."

체스터 폰 폴록.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로잘린의 머릿속에 관련 정보가 떠올랐다. 사교계에서 은근슬쩍 공작가와의 혼담을 찔러보던 백작가 놈이었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백작가의 위세를 살려보겠다고, 공작가의 외동딸인 로잘린에게 치근덕거리던 작자.

"체스터?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감히 어딜 넘봐! 당장 쫓아내라! 로잘린, 너도 저딴 놈 만날 필요 없다."

루드비히 공작이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로잘린은 목검을 어깨에 툭 걸치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기왕 찾아왔으니 얼굴이나 한번 보지요. 어떤 낯짝을 들고 왔는지 궁금하네요."

"음? 정 그렇다면야…… 하지만 놈이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면 내 손으로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

로잘린은 시종장을 따라 연무장 옆의 야외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 테이블에는 한 남자가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금빛 자수가 놓인 벨벳 코트, 기름을 떡칠해 뒤로 넘긴 갈색 머리, 얇고 비열해 보이는 입술. 그리고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려 로잘린을 바라보았을 때.

로잘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 저 새끼는?!’

강민철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처지고, 입술 끝이 얄밉게 올라간 낯짝. 특유의 사람을 깔보는 듯한 찌질하고 비열한 눈빛까지, 전생의 쓰레기 남편 강민철과 도장으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았다. 이 세계에서는 체스터라는 이름을 달고 귀족 영식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저 면상은 백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그 개자식의 얼굴이었다.

체스터는 훈련복 차림으로 목검을 든 로잘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쯧쯧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로잘린 영애.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만…… 복장이 참으로 난감하군요."

말투마저도 똑같았다. 은근히 상대를 깎아내리며 가르치려 드는 그 재수 없는 억양.

"내 복장이 어때서?"

"공작가의 영애라면 마땅히 정숙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계셔야지요. 칼이나 휘두르는 건 천박한 용병 놈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장차 제 아내가 되실 분이 이런 거친 행동을 하시면 사교계에서 제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체스터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싸구려 루비 반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았다.

"영애께서 아프셨다기에 제가 특별히 아끼는 가문의 보물을 가져왔습니다. 이 반지를 받으시고, 이제 쓸데없는 칼질은 그만두시지요. 결혼하면 여자는 집안에서 조신하게 남편을 내조하고, 공작가의 재산 관리나 제게 일임하시면 됩니다."

로잘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수정빛 눈동자 안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렁였다.

‘십 년 동안 내 피를 빨아먹고 딴 년이랑 뒹굴다 농약 처먹인 놈이…….’ ‘여기서도 가문의 재산을 노리고 내조 운운하며 빨대를 꽂으려고 해?’

전생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참을 이유가 없었다. 여기는 제국 최강의 공작저였고, 자신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공작가의 절대 권력자였다.

"체스터 영식."

"예, 영애. 이제야 제 진심을 알아주시는군요. 어서 제 손을 잡으……"

쩌어엉!

체스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로잘린의 목검이 체스터의 턱주가리를 정확하게 후려쳤다.

"끄어억?!"

체스터의 고개가 뒤로 사정없이 꺾이며 피 섞인 침과 함께 어금니 두 개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체스터의 몸뚱이가 뒤로 날아가 테라스 대리석 바닥을 세 바퀴나 굴렀다.

"꺄아악! 도련님!" 체스터를 따라왔던 하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커, 커헉……! 쿨럭! 이, 이게 무슨 짓……!"

체스터가 피를 뿜으며 떨리는 손으로 깨진 턱을 감싸 쥐었다. 눈에는 경악과 공포가 가득했다. 로잘린은 맑고 영롱한 눈빛으로, 그러나 입꼬리는 시원하게 끌어올린 채 목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다가왔다.

서걱, 서걱. 대리석 바닥을 긁는 목검 소리가 저승사자의 발걸음처럼 울렸다.

‘나는 제국 최강의 여장부 기사가 될 것이다. 내 앞길을 막는 자는 누구든 몽둥이로 대가리를 깨버릴 테다.’

"정숙? 내조? 공작가의 재산을 일임해?"